한국일보

생각하는 사람

2011-07-2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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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돈(법정 통역사)

60년대에 우리 민족의 지도자였던 함석헌 선생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라는 제목의 유명한 글을 발표해서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나는 이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나름대로 절실하게 깨닫게 된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나는 60년대 서울에서 남이 부러워한다는 직장에서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의 직장인들의 습관은 퇴근하면 곧바로 무교동 낙지 집 막걸리 골목으로 향하는 것이 마치 정해진 루틴처럼 되어 있었고 통금이 임박해서야 집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거듭하는 것이 판박이 생활 패턴이었다.

이렇게 지내던 어느 해 봄에 한 동료가 주말 등산을 제의했다. 이래서 막걸리에 찌들어 있던 동료들이 일요일 하루는 자연을 즐기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관악산에 올라가 산정에서 피크닉 식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안양 쪽으로 걸어 내려가 버스로 서울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산정에서 꿀맛 같은 점심을 양껏 먹고 난 다음에 오는 식곤증으로 바위에 기대어 눈을 붙이며 싱싱한 산바람과 자연의 풍요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때 놀랍게도 깨달음 같은 정신이 번쩍 드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냥 세월을 죽이며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작정 흘려보낸 아까운 세월이 후회로 가슴이 저려 왔다. 나는 당시 화려한 현 직장에 만족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이날 이후로 현실을 고민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로 결심했다. 관악산 산행은 이날 이후로 그 해 겨울 추위가 올 때까지 이어졌고 그 때마다 많은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그 깨달음으로 나의 인생의 길이 바뀌었다.

이듬해 나는 미국행을 결심하고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내가 이곳 뉴욕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는 마스터플랜이 만들어 진 셈이다.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 만사를 제치고 묵상에 빠지는 시간을 자주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시골의 호수 앞에 집을 가진 덕에 물가의 보-트 댁에 홀로 앉아 상념에 빠지는 것이 이제는 즐거움이요 황금같이 값진 시간이 되었다.며칠 전 386 세대 젊은이들과 술자리를 같이 한 일이 있다. 젊은이들은 모두 성공한 직장인들이었고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는 패기에 찬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전혀 유유상종 할 수 없을 나 같은 늙은이와 합석하게 된 까닭에 자연히 화제는 내가 살아 왔던 젊은 시절의 “나는 그 때...” 식의 경험담으로 이어졌다.

문득 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화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훌륭한 덕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내 인생의 갈림 길이 될 만큼 중대한 고비가 된 그때의 관악산 산행 이야기를 들려주고 되풀이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라”고 일러 주었다. 이날 이후로 이 친구들과 만난 적은 없다. 그러나 이들이 나의 권유 때문에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덕에 인생의 중요한 새로운 지표를 발견할 수 있다면 나는 저절로 훌륭한 늙은이가 되는 것이고 그 날의 술값을 갚는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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