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백남준의 방’

2011-07-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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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갑자기 한국 뉴스에서 백남준 기사가 막 뜨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지난 20일이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의 79번째 생일이었다. 지난 2006년 작고한 백남준의 생일을 맞아 경기도 용인 백남준 아트센터가 ‘NJP 서머 페스티벌-스물 하나의 방’ 전시회를 대대적으로 열고 있다는 보도이다. 전시회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이 축제는 9월 13일까지 열린다고 한다.

백남준이 누구인가, 독일에서 활동하다가 1964년 뉴욕에 정착, 40년 이상 우리와 함께 살던 옆집 이웃이 아닌가.맨하탄 곳곳에 그의 스튜디오와 자취가 남아있고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은 물론 휘트니 뮤지엄, 보니노 갤러리, 홀리 솔로몬 갤러리, 제임스 코한 갤러리, 특히 2000년 구겐하임 미술관의 백남준 초대전에서 우리는 그를 직접 만났고 작품을 대했다.1984년 34년 만에 한국을 찾은 이래 수시로 한국을 방문, 재능 있는 한국작가를 격려하고 뉴욕의 한인문화 행사에 참여, 우리들은 엘리베이터에서 그와 마주치기도 하고 기념사진을 함께 찍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곁에 있던 그가 오랜 투병 끝에 2006년 1월 29일 세상을 떠나자 맨하탄 프랭크 캠벨 장례식장에 달려가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고 ‘바이, 바이 남준 백’을 외치며 남자들은 넥타이를 자르고 여자들은 스카프를 잘라 마지막 퍼포먼스에 동참키도 했다.그런데 지금 너무 조용하다. 수많은 맨하탄의 전시장에 한인작가들, 문화 관계자들, 백남준 주위에 인의 장막을 치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두 달 전, 새로 단장한 퀸즈 아스토리아의 영상 박물관(American Museum of the Moving Image)에 갔었다. 6,700만 달러 공사비를 들여 기존건물 2배로 확장한 아스토리아 영상박물관은 입구부터 1층, 극장까지 설국처럼 멋진 환상의 세계로 변해 있었다.

이곳에 가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이 오래 전에 보았던 ‘백남준의 방’이 어떻게 근사하게 바뀌었나였다. 수십 개의 나무의자가 놓인 자그마한 회의실 입구 윗부분에 부착된 ‘백남준의 방’. 그 이름이 얼마나 빛나보이던지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이에게 ‘한국작가야’하고 자랑했었다.그런데 못 찾았다. 267석 규모의 근사한 극장과 영상물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넓은 전시장, 수많은 미국의 명작과 스타들 사진까지 그대로 있는데 ‘백남준의 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자리는 고대 이집트의 피라밋 내부를 본딴 소극장이 되어 있었다. 투탕카멘왕의 푸른 황금 마스크와 파라오의 좌상이 그려진 벽지가 사방을 어지럽게 덮은 가운데 반지하로 내려가면 관에 누운 모형 미이라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이 영상박물관은 시대별로 미국 영상 자료를 소장하여 수 백편의 영화가 끊임없이 상영되고 있다. 가끔 ‘한국영화의 오늘’ 시리즈를 상영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백남준의 생일이나 기일을 맞아 TV와 비디오 등 전자영상에 관심을 갖고 세계최초로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 백남준의 초기작, 평생 그가 제작한 수백 수천편의 영상물이 상영될 법도 한데 감감소식이다.

뉴욕에 사는 우리들 책임이다. 보존할 줄도 모르고, 주어진 것도 지켜낼 줄 모르는 우리가 백남준의 가치를 잊어버린 탓이다. 그곳과 서너 블럭 거리인 이사무 노구치 미술관은 일본계 미국인인 이사무 노구치의 작품 수백점이 실내와 정원에 절묘한 조화로 전시되어 그를 기린다. 언제 가도 학생들이 견학 와서 열심히 교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만 바글 바글, 요란하게 ‘천재 예술가 백남준’을 외치면 뭘 하는가. 정작 그가 살면서 활동한 무대는 뉴욕인데, 정작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뒤늦게라도 뉴욕에 백기사(백남준을 기리는 사람들)가 생겨 그의 스튜디오를 보존하고 ‘백남준의 방’을 되찾고 그의 업적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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