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술지게미와 쑥버무리

2011-07-0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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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날씨가 덥다보니 부엌에서 열기 피워가며 밥 해먹기가 쉽지 않다. 주말이 되면 무언가 끼니를 때우면서 더운 날 입맛도 다스리는 음식이 무엇인가를 찾게 된다.

지난 주 6.25 61주기를 지내면서 한국 각 지에서 주먹밥, 보리개떡, 찐감자 등 6.25전쟁 음식 시식회가 열렸다고 한다. 난리통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먹었던 음식들의 시식회는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그 시절을 체험시키기 위해 치러진 것이다. 소금 간으로만 된 시커멓고 거친 음식을 넘기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의외로 다들 웰빙시대에 비타민이 풍부한 건강식이라면서 잘 먹었다고 한다.


나이를 먹느라고 그런 건지 과거에 먹던 음식이 자꾸 입에 당기고 있다. 삶은 고구마, 구운 감자, 보리개떡, 밀개떡, 수제비, 닭죽....
시골에 가서 얻어 먹은 음식으로 팥개떡이 있다. 밀가루를 고운체로 치고 반죽하여 쪄낸 개떡 한옆으로 사카린을 넣어 달착지근한 삶은팥이 곁들여 있었다. 모양이라 할 것도 없이 그저 손바닥 크기로 납작하게 빚어서 쪄낸 것을 별로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달게 먹었다.

지난 주 비가 오는 날에는 뉴욕에서 수제비 잘한다고 소문난 식당으로 가서 후후 불어가며 뜨거운 수제비를 먹었다. 식당의 수제비는 종잇장처럼 얇게 떠서 입에 착 달라붙었다.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던 수제비는 두껍고 컸다. 턱 받치고 식사를 기다리는 식구가 많다보니 마음이 급하고 손도 급하다보니 일단 반죽을 떼어 끓는 물에 넣기 바빴을 것이다. 두껍다보니 밀가루가 채 덜 익은 것도 있었는데 사실 그것이 더 맛있었다. 그래서 집에서 수제비를 만들 때는 일부러 두껍게 해보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그 맛이 날까 궁리하면서.
부산에 살던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술지게미도 맛본 적이 있다. 하루종일 나가 놀던 나이라 밥 먹고 동네 한바퀴 돌면 배가 꺼지던 시절, 같은 반 아이가 자신은 늘 배가 부르다고 자랑했다.

그날도 그 아이는 동네 양조장으로 같이 가자고 졸랐다. 아마 우리 부모님은 그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한 것 같은데 밥보다 맛있다, 사람들이 다 퍼가도 주인이 아무말 안한다며 계속 졸라대니 커가는 호기심과 유혹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양조장에서 술지게미가 흘러나오는 것을 구경했다. 어른들과 아이들이 몰려 있다가 뜨거운 김이 나는 누런 액체가 도랑 같은데로 흘러나오자 다들 허겁지겁 퍼먹고 그릇에 담는데 술 냄새가 확 끼쳤다.
그 아이는 내 입에도 한 수저 넣어준 것 같은데 나는 역하고 텁텁한 것이 입에 들어오자, 바로 뱉어 버렸다. 아이는 맛있다면서 계속 집어먹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술지게미로 배를 채우는 극빈가정 아이였지만 당시는 그런 것을 몰랐다.부자와 서민, 극빈자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그저 왜 그 아이는 이런 것을 밥으로 먹는 가였다. 지금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그 아이를 집에 데려가 제대로 된 밥 한 끼를 먹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그 시절로 아무도 돌아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혀에 길들여진 과거의 음식 맛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 그저 비슷하게 흉내 냈을 뿐이란 걸 알면서도 기를 쓰고 찾아 먹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아무리 미국에 오래 살아도 추억이 서린 입맛을 버릴 수 없어 과거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보리개떡과 빈대떡, 김치 수제비를 해먹는 한인들이 많다.

얼마 전에는 가끔 먹을 것을 챙겨주는 고마운 친구가 자신이 직접 캐서 깨끗하게 씻어 말렸다며 쑥 한 봉지를 주었다. 나는 요즘 매일 쑥버무리 해먹을 생각에 즐겁다. 물이 펄펄 끓으며 솥뚜껑 사이로 새어나오는 쑥향이 온 집안에 퍼지겠지, 파릇한 쑥에 흰눈이 내린 듯 군데군데 쌀가루가 배어서 적당히 익은 쑥 버무리는 상상만 해도 흐뭇하다. 이번 주말에는 기어코 해먹어야지. 아무 맛도 아닌 그 맛, 전통의 깊은 맛이 좋은 것은, 이것도 나이들어간다는 증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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