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실망 안겨준 순애보

2011-06-1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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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지난주 90대 노부부가 마주서서 입을 쪽 맞추는 재미있는 외신사진이 눈에 띄었다. 몬태나주 빌링스에 사는 이들 노부부가 결혼 69주년을 맞아 혼인서약을 다시 한 후 찍은 기념사진이다. 요즘은 7순을 ‘고래희(古來稀)’라고 하지 않는다. 69주년 결혼기념일쯤 돼야 고래희라는 말이 어울린다. 이들은 금혼식(50주년)은 물론, 다이아몬드 혼식(60주년)도 이미 9년 전에 치렀다고 한다.

한국에선 결혼식 때 주례가 흔히 신랑신부에게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해로하라”고 이른다. 신혼부부가 백발이 되어 죽을 때까지 한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함께 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 세태는 어떤가? 한 평생은커녕 결혼한 지 채 일 년도 못돼 이혼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또 부부가 자녀를 낳고 10년 이상 잘 살다가도 하루아침에 갈라서 아빠나 엄마가 없는 결손가정이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는 50대 이상의 중·노년 층 한인들 가운데도 ‘황혼이혼’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가정문제 연구기관이 최근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600여건의 가정문제 상담 중 이혼이 44건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 55세 이상의 황혼이혼율도 지난해에 비해 남자는 9.9%, 여자는 9.3% 늘어난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에서도 지난 2007년 결혼대비 이혼율이 47.4%를 기록, 미국(51%)과 스웨덴(48%)에 이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세 번째로 높았다. 이혼의 주요원인은 성격차이, 경제문제, 배우자 부정, 가족불화 등의 순이었다. 성격차이가 44.5%로 거의 절반을 차지하지만 갈라서야할 만큼 심각한 성격차이는 많지 않다. 그보다는 경제문제가 만만치 않은 것 같다. 한국에선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향상되면서 이혼이 크게 늘었다. 미국 내 한인사회에도 돈이 문제가 돼 부부가 서로 등을 돌리는 사례가 크게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는 요즘의 불황을 겪는 과정에서 이런 추세는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상대방의 성품과 인격은 뒤로 하고 돈, 명예, 지위 따위를 먼저 계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이런 결혼에선 결혼의 본질인 사랑이 움트기 어렵고, 이에 따라 결혼생활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깨지게 마련이다. 신체장애자이면서 미국의 법조인으로 입신한 정범진 판사와 한국의 유력한 벤처사업가인 이수영씨의 결혼이 7년만에 파경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요즘 세인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들은 결혼 당시에도 큰 화제를 불러 모았었다. 요즘 세태에 장애인 판사와 여성사업가의 순애보가 너
무나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결혼을 지켜보며 감동했고, 앞으로 부딪치게 될 여러 가지 난관을 이들 부부가 슬기롭게 극복하고 백년해로 할 것을 내심 빌었었다.

그러나 이들의 파경 소식은 감동이 컸던 만큼 충격도 컸다. 이들을 지켜본 사람들이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며 허탈해하는 분위기다. 특히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상대방이 처음부터 조건을 보고 결혼한 것이 파경의 원인”이라고 주장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누구 말이 맞는 말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은 애당초 순애보가 아니었다. 파경과정 또한 여느 커플들의 흔해터진 이혼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입맛이 씁쓸하다. 서울시의 경우 결혼생활 4년차 이하의 신혼부부 이혼율이 25%인 반면 결혼생활 20년 이상의 중년부부 이혼율은 27.3%로 집계됐다.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90년 이후 중년 이혼율이 신혼 이혼율을 처음으로 앞질렀다. 이혼위기가 신혼초보다 오히려 결혼생활이 안정을 이룰 중년이후에 더 많아진다는 대목이 관심을 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도 “별을 두 개(혹은 세 개) 달았다”는 등 마치 이혼이 훈장이나 되듯이 많이 할수록 자랑인 것으로 착각하는 중년들을 볼 수 있다.

바야흐로 결혼의 계절이다. ‘6월 신부(June Bride)’들의 청첩장이 심심찮게 날아든다. 결혼은 조건이 아닌 사랑임을 이들 예비 신랑신부들이 깨닫기를 바란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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