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책의 시대는 가버린 것인가?

2011-06-1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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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

TV, 인터넷, DVD 등의 대중화로 수천 년 동안 인류 문화의 가교(架橋) 역할을 해온 문자, 곧 책이 사람들로부터 차차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안타깝지만 사실인 것 같다. 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문자보다는 그림에 매달리고 있다. 그림이 어떤 개념을 문자보다 빨리 전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뜻을 음미하고 계속해서 생각하게 하는 정신적 에너지로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책이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요즘 어른을 위한 만화가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지식 흡수를 위하여 깊이 생각하기를 은근히 꺼려하는 현대인의 모습일 것이다.TV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지만 라디오를 없애지는 못하였다. VCR와 DVD가 약진하였으나 영화관의 문을 닫게는 못하였다. 기술의 발달로 읽는 방법이 변화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서문화의 가치는 여전히 남는다. 미국의 경우 지난 10년 동안 책의 인쇄는 40% 증가하였다.


빌 게이츠도 말하고 있다. “컴퓨터 화면을 읽는 것보다는 아직도 종이에 인쇄된 글을 읽는 것이 훨씬 보편적이다. 나 자신도 컴퓨터 화면보다는 일단 종이에 프린트해서 읽는다.” 나는 일본 도쿄에서 구두를 닦은 일이 있다. 길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독서에 여념이 없는 구두닦이 아줌마를 보고 그 앞에 앉았다. ‘얼마나 재미있는 만화를 보고 있기에 저렇게 정신이 팔려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아줌마의 책을 들여다 보았더니 동서양의 철학사상을 담은 문고판이었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지하철에 타면 대부분의 승객들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본다. 책 팔리는 양이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말한다는 말도 있지만 만화만 보는 아이들, 비디오 게임이나 즐기고 TV 앞에서 몇 시간씩 소비하는 사람들의 나라가 발달할 수는 없다.책은 공기처럼 나를 새롭게 하고 배의 돛처럼 나를 전진시킨다. 책을 읽는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성장하기 힘들다. 학교교육의 첫 걸음은 책읽기로부터 시작된다. 어렵고 복잡한 학문이나 깊은 예술이나 종교도 책을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벗 중에 가장 틀림없
는 벗이 책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결코 고독하지 않다. 책의 사상이 마음을 윤택하게 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알고 깨닫는 재미가 너무나 나를 흥분시키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결코 좁은 세계에 살지 않는다. 책이 과거 현재 미래의 세계로 나를 날아다니게 하기 때문이다.

한 권의 찢어진 책이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피난선을 타고 한 달을 지낸 일이 있다. 경찰관들이 징발한 어선이었다. 경찰 한 사람이 작은 책을 한 쪽씩 찢어 엽초를 말아 피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가 보니까 성경책이었다. 법대 1학년인 나는 줄곧 바지 주머니에 영한사전을 가지고 다녔다. 나는 그 경찰에게 영한사전을 보여주면서 바꾸자고 했다. 그는 성경과 사전의 종이 질을 비교해 보더니 얼른 바꾸어 주었다. 그 성경은 신약성경과 시편이 부록으로 붙어있는 포켓 형 성경이었다. 마태복음 17장까지는 이미 담배로 말아 피었기 때문에 연기가 되어버렸지만 피난선에서 한 달 동안 신약성경을 열 번 읽었다. 가족을 찾아 부산에 도착하다. 마침 모교인 고대는 대구에서 개교하였다고 하여 열흘을 고민하다가 부산에서 개강한 감리교 신학에 전학할 것을 결심하여 오늘날까지 평생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찢어진 성경이 나를 방향전환 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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