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는 여름 어린이다

2011-06-0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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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너희는 좋겠다. 성적표가 없어서...” 어린이가 오리가족 사진을 들여다보며 하는 말이다. 아빠오리가 앞장서고, 아기오리들이 한 줄로 뒤따르고, 맨 뒤에 엄마오리가 걷는 모습이 아름답다. 이것을 보고 있던 어린이에게 느닷없이 성적표가 생각난 것이다.

여름방학이 가까이 오고 있음은 걱정거리가 닥쳐옴을 말한다. “너, 성적표야, 바람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 버려라.”성적표는 자녀를 꾸짖는 꼬투리가 된다. 자녀의 성적이 나쁘면 말할 것도 없고, 좋더라도 욕심이 생겨서 불만을 말하게 된다. “넌 부끄럽지 않니? 이런 성적으로 어떻게 좋은 학교에 갈 수
있겠어? 네 친구 아무개는 잘 했을 텐데...” 듣고 있으면 끝없이 이어지는 엄마 아빠의 불평이 듣기 싫다. 수많은 칭찬과 격려의 말들은 어디로 갔을까. 친구들과의 비교는 더욱 참기 힘들다.

긴 여름방학이 부모에게는 큰 부담이 된다. 어디에 맡기나, 어떻게 시간을 보내게 하나, 무엇을 가르치나, 누구와 만나게 하나, 가족의 특별한 행사는 어떻게 계획하나, 시간과 경비는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등등을 생각해야 하는 여름방학이 너무 길다. 부모의 복잡한 사정을 이해하기에 자녀들은 너무 어리다.


여름방학이 가까이 올수록 자녀들의 마음은 부풀어오고, 학부모들의 고뇌는 깊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매년 있는 방학, 불평하거나 무리할 것이 없다. 자녀들도 틀림없는 가족의 한 사람이니까 가정 사정에 알맞는 즐거운 여름방학 계획을 세운다. 즉, 가족애를 느끼고, 가족이 협력하는 기간으로 삼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들이 ‘나는 여름 나무’라고 부르짖게 한다. 나무의 여름은 성장기의 절정을 이룬다. 자녀들의 몸과 마음도 여름에 부쩍부쩍 자란다. 이 시기에 가족의 일을 돕고, 배우고 싶은 것은 배우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실컷 놀거나 자고, 돌아다니면서 자라는 것이다. 틀에 박힌 학교 생활을 떠나서, 색다른 체험으로 마음껏 여름을 즐기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우리 자녀에게 첫째로 길러주고 싶은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자기 행동을 조절하는 자율성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자녀는 자기 스스로 자라야 하는 독립적인 생명체이다. 부모나 교사 그밖에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단독의 존재이다. 그래서 자녀 자신이 살아나가는 역량을 기를 수 밖에 없다. 처음에는 서툴더라도 차츰차츰 자율적으로 내 생활을 이어나가는 힘이 길러지는 것을 지켜보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해, 이렇게 해, 이 길을 가, 이 책을 읽어, 이렇게 써, 이 친구하고 놀아... 등의 지시를 바꾼다. 넌 어떻게 생각해?, 읽고 싶은 책은 무엇이지?, 어떻게 쓰고 싶어?, 누구하고 놀까?... 등으로 바꾼다. 이런 방법으로 질문하면서 자녀를 키우려면 시간이 걸린다. 실패할 수도 있다. 자녀의 움직임이 더디고 성과에 만족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귀한 성장 과정이다. 누구나 이렇게 삶의 방법을 배웠다.

드디어 자녀들이 간섭하는 부모에게 외친다. “I like to be myself.” 이렇게 되면 강한 삶의 방법을 익히고 본 궤도에 오른 자녀의 강한 모습을 보게 된다. 자녀들에게 집중적으로 삶의 방법을 습관화시키기 좋은 때가 여름방학이다.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일조차 결정을 못하고 부모의 얼굴만 쳐다보는 자녀라면 곤란하다. “내 생각대로 하겠어요. 내 일이니까”라고 말하는 자녀를 키우고 싶다. 어차피 혼자 살아야 할 테니까.

여름은 만물이 왕성한 생명력을 보이는 계절이다. 우리 자녀들도 ‘나는 여름 나무’라고 외친다. 길고 지루할 것 같은 여름방학을 잘 활용하면 자녀들에게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성적표를 참고 자료로 하면서 부모의 가정교육을 점검하는 기회로 삼으면 좋겠다. 우리도 너희를 따라 ‘여름에 자라는 학부모’가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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