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할머니

2011-05-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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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 객원논설위원

흔히 사람을 사회적동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을 약속의 동물이라고 하면 어떨까. 일평생 살면서 사람은 아주 작은 약속에서부터 큰 약속까지 약속 속에서 살아가기에 그렇다. 약속의 의미 안에는 계약이란 뜻이 담겨 있다. 계약은 서로간의 지켜야 할 권리와 의무사항을 말한다.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될 그런 사안이 아니다. 약속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 성립된다. 그러나 자신과 자신과의 약속도 있다. 자신과의 약속에는 양심이란 것이 작용한다. 양심이란 말 그대로 밝은 마음이다. 자신과 자신과의 약속의 잣대는 곧 양심이 된다. 양심은 마음속에 있는 마음의 법이다. 자신이 자신에게 계약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마음은 아파지게 된다. 양심이 찌르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한 할머니가 있다. 84세에 대학을 졸업한 에블린 말쯔버그 여사다. 53세에 저지시티대학에 입학해 지난 11일 졸업했다. 할머니는 “대학 졸업장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라며 손자 같은 학생들과 함께 졸업식에서 손을 흔들며 기뻐하는 모습이 신문지상(뉴욕한국일보 5월16일자 A18면·Star Ledger지 참조)을 통해 전해졌다.


창작(Creative Writing)을 전공한 할머니는 1980년에 입학해 매 학기마다 한 과목씩만 이수했다. 할머니는 대학교 수학과정을 통과할 때 악몽 같은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0년을 공부해 온 할머니는 “내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반드시 대학 졸업장을 따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2학년 기초과정을 마치고 3학년 전공 과정부터 시작한 작문(창작)시간에는 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었다며 음악시간 피아노 치는 법을 배운 것이 즐거웠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특출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일 학교를 그만 두려는 학생이 있다면 나를 생각하기를 바란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고.약속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있다. 부모는 자녀를 올바르게 키워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독립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교육받으며 성장할 권리가 있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의무가 있다. 부모가 늙으면 자녀로부터 지원을 받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문서로 되어 있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약속이다.

생을 잘 꾸려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약속을 잘 지킨다. 그런 사람들은 설령 약속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 하더라도 한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들이다. 작은 약속이라도 약속을 허술하게 여기고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신용이 없는 사람으로 전락할 수 있다. 구두로 한 약속이든 서면으로 한 약속이든 약속은 서로 지키려고 있는 것이다.

약속은 곧 믿음이다. 믿음은 곧 신용이다. 크레딧카드로 물건을 사고 매월 지불할 때 약속한 날짜에 돈이 입금되지 않으면 벌금을 내게 된다. 약속을 어겼기에 그렇다. 이렇듯, 약속은 지키고 안 지키기에 따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이익을 가져오고나 손해를 가져온다. 크레딧점수가 좋은 사람들은 그만큼 약속을 잘 지켰다는 증거이다. 약속을 지키려다 죽은 사람도 있다. <장자> 잡편 중 ‘도척’편에 나오는 미생(尾生)이란 사람이다. 그는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여자는 오지 않고 물만 불어났다. 그래도 그는 다리 밑을 떠나지 않고 기둥을 껴안은 채 죽고 말았단다.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
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미생은 죽음으로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요즘 사람치고 미생처럼 죽으면서까지 여자와의 약속을 지킬 남자는 없을 것 같다. 모두가 영리한 사람들이니 살짝 물속을 빠져 나올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설정해 놓고 자신이 해결해야 할 마음의 약속이든 그 어떤 약속이든 한 번 약속은 반드시 지킬 필요가 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84세에 대학 졸업장을 받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고 좋아하는 에블린 말쯔버그 여사. 조금만 어려워도 금방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그렇다. 끈기다, 오래 참음이다.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올바른 목표로 약속을 정해 놓았으면 그 길을 향해 묵묵히 어려움을 극복해 나아가는 것이다. 30년 만에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할머니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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