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신없이 사는 세상

2011-05-1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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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영(목사)

정신없이 사는 세상이란 너무 바쁘게 산다는 뜻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정신은 없고 몸(입)만 가지고 산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정신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역사를 창조하는 힘이 그 속에 있다. 과거 우리 선배들의 정신문화를 살펴보면 물질(돈)만 추구하고 정신은 동공화된 오늘의 우리의 모습과는 달리 풍요한 정신으로 그 시대를 살아간 자취를 보게 된다.역사의 발전이란 과학의 발전과 동시, 정신문화도 함께 발전되어야 한다. 요즘같이 행복에 대해
민감했던 때도 드물 것이다. 물론 행복을 느끼는 단계는 육신의 만족이 정신에 인식될 때, 비로소 동물적 감각하에 행복의 개념이 형성된다. 때문에 우리는 삶속에서 고통의 요소들은 가급적 최소화하고, 풍요와 건강을 유지함에 신경을 써야할 필요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은 꼭 육신적 행복으로만 만족하는 게 아니고 정신적, 종교적, 그리고 다양한 부분까지 행복의 욕구가 있다는 것이 하등동물과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행복을 형이하학적 내지는 형이상학적으로 구분한다면 형이하학적 행복론(육체적, 물질적)은 마치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구름’ 같아서 여기엔 반드시 ‘권태’를 동반한 불행감과 ‘허무주의’를 피할 우산을 준비해야 하지만 반대로 형이하학적 행복론(정신적)은 마치 ‘햇볕을 동반한 구름’과 같아서 꾸준한 기쁨을 동반하기에 우산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행복을 위해 발 벗고 나선 현대인들은 풍요한 삶속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에게 누가? 왜? 에덴에서 쫓아냈으며, 쫓겨났는가?를 반드시 물어보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닌 자신들이 생산한 ‘권태’와 ‘정신의 부재’라고 분명 말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하루는 보석상에 들어가 “나에게는 필요 없는 것들이 이렇게 많이 진열돼 있구나!” 했다 한다. 물론 예수는 더 말할 나위 없는 무소유자이다.

가롯 유다가 제일 행복했던 때는 예수를 팔려고 정신을 잃었던 때였고 반면, 삭개오가 제일 행복했던 때는 속여서 번 돈, 가난한 사람을 위해 갚겠다고 예수의 정신을 되찾았을 때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 소풍날 아침, 도시락 하나 싸들고 존경하는 선생님 뒤를 따라 희망의 들판으로 달렸다. 하지만 풍요로운 오늘날 아침에는 우리를 즐겁게 하였고 또 우리가 그토록 존경했던 십자가 정신으로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 히포크라테스 정신으로 극빈 환자들을 보살핀 장기려 의사선생님, 나이팅게일 정신으로 헌신한 테레사 수녀님, 교육의 정신으로 빈민촌어린이 교육을 위해 희생한 페스탈로찌, 아프리카 수단 내전에도 불구하고 현지 가난하고 병든 어린이들을 위해 평생 살다 간 순교자 이태석 신부님.

또 풍요한 현실에서 일생을 무소유로 현대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떠난 법정스님, 일평생 사랑과 헌신에 몸을 바친 김수환 추기경, 법의 정신으로 인간을 사랑한 라과디아 변호사님 그리고 지휘자 카라얀, 성악가 파바로티 또한 세기의 미녀까지 다 연주하다 퇴장한 이 텅 빈 무대를 나는 그저 정신없이 바라만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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