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평범이 곧 위대함이다

2011-05-1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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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의 거장 이광수 선생은 금강산 기행이라는 수필에서 ‘위대는 평범이외다’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금강산 정상에 이르러 어디에서나 봄직한 평범한 바위돌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위대는 평범이외다. 나는 이에서 평범의 덕을 배웁니다. 평범한 저 바위가 평범한 봉두(峯頭)에 앉아 개벽 이래 수천만년 동안 말없이 있건만은 만인이 우러러 보고 생명의 구주(救主)로 아는 것을 생각하면 절세의 위인을 대하는 듯합니다”라고 대오각성의 일성을 외친 것이지요.


“어떻게 살 것인가?”가 한동안 고민의 주제가 되었던 빡빡머리 고등학생에게 이 짧은 문장이 준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내 삶의 지향점은 성실하게, 평범하게,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의 일을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위대함의 정의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정작 대학을 마치고 사회에 첫 발을 들어서면서 만나게 된, 사회 전반에 자리잡고 있는 많은 편견들로 인해 나의 가치와 생각들을 지탱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 내면의 실체보다 포장된 겉모습이 평가의 기준이 되고, 그 사람이 걸친 화려한 명성 심지어는 의복들에 따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달라지는 속물적 근성들이 내가 규정해 놓은 삶의 가치에 커다란 혼돈을 가져왔던 적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현실 속에서는 성실한 평범함보다는 계산된 비범함이 각광받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러한 혼돈의 세계를 잘 극복하고 아직은 나의 초심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나를 “위대하다”라고까지는 아니지만, “최고”라고 믿어주는 나의 가족들이 있으니 최소한 헛살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아직 가끔은 혼돈스러운 나에게 요즘 신나는 일들이 도처에 일어나고 있어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습니다.

영국 프리미어 축구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지성 선수가 그러하고, 미국 프로골프 대회에서 활동하는 최경주 선수가 그러하고, 게다가 한국의 TV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 임재범이 그러합니다.

타고난 재능, 화려한 기술은 없지만, 성실히, 열심히 자신의 역할을 감당해 온, 이제는 드디어 2011년 리그 우승의 주역으로 모든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는 박지성 선수에게서 “성실한 평범함이 위대하다”는 진리를 보게 됩니다.


필마단기로 태평양을 건너, 꿈의 미국 골프무대에 도전한 지 십년여만에, 결국 지난 주 가장 많은 상금이 걸려 5대 메이저 골프대회라 불리는 PGA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트로피의 주인공이 된, 완도의 시골마을 출신의 최경주 선수가 “꾸준함이 타고난 비범함을 압도”하는 진리를 일깨워 줍니다.

평생 자신의 음악 스타일만을 고수하여 매니어층에만 알려졌던 가수 임재범에게 20년만에 쏟아지는 대중들의 환호와 갈채가 우둔해 보이지만 자신의 것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공합니다. 내가 바라는 세상은, 평범함이 비범함을 누르고 위대해지는 것이 아닌, 평범함도 비범함 못지않게 위대하다는 것이 인식되는 세상… 그것이야말로 내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평소 내가 주장하던 말들이 현실의 증거로 나타나는 듯하여, 호들갑을 떨며 가족들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사뭇 우쭐해졌던 모양이지요?

어느 날 “당신의 모발을 돌려드립니다, 지금 전화하세요”라는 가발 광고를 유심히 보고 있는 내 뒤에서 둘째 딸아이 왈…

“그러니까 아빠는 절대 가발 쓸 생각 말고 그대로 훤히 머리 드러내고 다녀…”

아이고…. 역시 귀여운 그 괴물은 나의 아킬레스 건입니다.


박 준 서
(월드비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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