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돼야

2011-05-1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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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베이브릿지 콘도)
1961년 5.16 혁명 때 남한의 국민소득은 82달러에 불과했으나 1978년에는 1640달러로 20배나 커졌다. 한편 같은 시기 김일성은 195달러에서 1114달러로 키우는데 그쳤다.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구조를 중화학공업으로 바꾼 것은 비전과 통찰의 결정판이었다. 한국이 휴대전화 수출 1위 국가가 될 줄은 감히 누가 꿈이나 꿨겠는가. 대형 선박을 만들며 산업의 쌀인 철강을 주조했겠는가? 광부와 간호사, 가발을 수출하던 나라였으니...

중화학, 자동차 등 한국 첨단기술의 산실인 과학기술원 카이스트도 대통령이 월급의 몇 배를 주어가며 외국의 실력 있는 한국과학자들을 모셔다가 세운 것이다. “여러분... (중략)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요.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반드시...”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 방문 때 한 일화는 지금도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를 맞이하는 광부와 간호사 500여명이 모인 ‘루르’탄광 공회당에서 부르던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대통령과 광부, 간호사의 목메인 제창은 끝을 맺지 못하게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민족 중흥과 국가발전의 기초를 닦은 개척자였다. 이제는 후손의 도리로써 국립 현충원 추도식 뿐만 아니라 기념관 동상건립 사업 등을 궤도에 올려놓아야 될 것으로 본다.한국민에게 큰 행운을 가져다준 대통령 기념관이 아직 없다는 것은 국가의 수치일뿐 아니라 후손으로서의 도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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