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간판이냐 실속이냐

2011-05-1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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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한국에선 변호사나 의사처럼 ‘사’자 붙은 직업의 신랑감에게 시집가려면 열쇠 세 개를 지참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아파트와 사무실(병원)과 자동차 열쇠이다. 이런 선입견을 갖고 있던 중, 최근 한 한인단체 행사에서 만난 1.5세 변호사에게 “요즘 어떠냐”고 물었다가 깜짝 놀랄만한 대답을 들었다. 한인사회에 이름이 꽤 알려진 그는 대뜸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한인변호사가 매년 수없이 쏟아져 나와 포화상태가 돼버린 탓에 렌트는 물론, 밥도 제대로 못 벌어먹는 변호사가 많다며 자신도 이 직업을 오래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은 물론,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변호사는 아주 잘 나가는 직종, 성공
한 직업으로 간주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물론 실력이 출중해 미국의 대형로펌에 들어가 성공적으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한인 변호사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극소수일 뿐, 모르긴 해도 그의 말처럼 적지않은 변호사가 현실적으로 매우 고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도 한인부모들은 여전히 자녀들이 ‘사’자 직업 갖기를 바라고 은연 중 다그치는 분위기다. 돈 많이 벌고 사회의 특권층으로써 누릴 수 있는 베네핏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아직도 ‘사’자 직업에 대한 혜택이 확실히 존재한다. 일종의 기득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이익이나 이권을 보이게, 또는 안 보이게 누린다. 그래서 자녀들이 어떻게든 일류대학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혈안이다. 그것이 소위 ‘SKY’그룹 등 소수 특권층 집단으로의 진출을 위한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창의성과 독창성을 중시하며 지정의를 가르치는 올바른 교육이 무에 필요한가.

요즘 대학졸업을 앞둔 한인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나름 청운의 뜻을 펼칠 꿈에 부풀어 있다. 하지만 직장의 문호는 여전히 좁아 학생들의 표정이 전반적으로 밝지 않다. 갚아야 할 학비 빚은 너무 많은데 직장조차 구하기 쉽지 않다보니 신명이 날 리 없다. 부모의 성화로 비싼 학자금을 들여 좋은 학교는 졸업했지만 사회에서 직업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실용적인 지식이나 기술이 없어 막막하다. 특히 지금같이 일자리가 귀할 때는 더욱 그렇다. 졸업후 직업을 가져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따리 싸들고 부모의 집으로 들어와 얹혀서 먹고 잔다. 명문이라는 간판에 연연하지 않고 커뮤니티 칼리지를 다녔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전공분야, 창의력, 적성 등을 고려해 현실적으로 필요한 공부를 했다면 이보다 훨씬 더 실효성있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얼마 전 한국의 모 방송국이 아나운서 선발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그 중에 순발력을 테스트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각자가 뽑은 주제에 대부분 즉흥적인 설명을 하지 못했다. 단 한명만이 자기가 뽑은 ‘스파이’라는 주제를 유창하게 풀어갔다. 객관성 위주의 한국식 교육이 빚어낸 한심한 결과였다. 미국에서 자라 공부한 한인학생들의 경우도 비슷하다. 부모의 뜨거운 교육열로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까지는 해내지만 일단 입학한 뒤에 공부는 못 따라가기 일쑤다. 그러다보니 많은 학생들이 중도 포기하거나 휴학하는 수모를 겪는다.
실용위주의 미국식 교육제도가 설득력을 얻는 이유가 있다. 이웃의 한 한인 젊은이는 동네에 있는 커뮤니티 칼리지를 나와 극심한 불경기 속에서도 직장을 번듯하게 잡아 활기있게 일하고 있다. 알맹이 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명문대 출신들보다 훨씬 풍요로워 보인다.

요즘 한인사회에도 명문대학을 나왔지만 일자리가 없어 허송세월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자존심 때문에 막 일은 할 생각도 않는다.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변호사조차 자기 직업에 회의를 느끼는 세태에 미국식 교육의 장점을 잘 활용하면 적어도 빛 좋은 개살구는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속은 비어 있는데 겉의 간판만 화려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유명브랜드를 내세우며 파리만 날리기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실속을 많이 챙기는 쪽이 훨씬 잘하는 비즈니스이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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