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족의 울타리 어디갔나

2011-05-04 (수)
크게 작게
여주영(주필)
지난 주 출근하자마자 낯모르는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틀랜틱시티 카지노에 드나들던 한인이 전날 새벽, 타고 가던 버스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카지노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다는 것이다. 전화 건 남자는 목격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요즘 돈 못 벌어 집에서 쫓겨나거나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는 한인들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도박장엘 드나들곤 하는데, 그도 아마 그런 사람일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죽은 한인의 신원을 탐문한 결과 미국의 대도시를 전전하며 외롭게 살아온 신원미상의 한인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도 한때는 행복한 가족이 분명히 있었을 터이고 한 가정의 어엿한 가장이었을 것이다. 무슨 연유에선지 한순간에 집을 잃고 가족을 떠나 홀로 거리를 배회하고 다녔을지 모른다. 또 얼마 전 미국에서 유학중인 자녀를 만나러 왔다가 집을 나가 자살한 한국인 기러기 아빠의 비극도 알고 보면 가족을 묶어주는 단단한 울타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자녀를 미국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해체하고 아버지는 한국에서 혼자, 어머니는 미
국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 이들의 삶은 늘 불안과 걱정, 염려로 가득했을 것이다. 결국 가장이 직장에 사표를 내고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가족들과 합류했다. 그러나 이들의 재회기쁨은 잠시였고 곧 현실문제에 부딪쳤다. 부부 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아 ‘여기서 살자’ ‘저기서 살자’하며 옥신각신했다.
결국 회한과 절망에 빠져 고민하던 가장은 정신적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자녀교육을 최우선 순위로 삼아 가정을 해체한 부부가 거둔 비극적 결말이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자녀들을 미국에서 교육시키는 것
인가, 아니면 가족을 평생 울타리처럼 보호해줄 가정을 지키는 것인가.

누구에게나 가정은 하루 종일 세파에 시달린 후 저녁이면 돌아와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온하게 쉴 수 있는 삶의 보금자리이다. 가족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사랑과 정으로 보듬어주는 아름다운 공동체다. 기쁨과 슬픔, 웃음과 눈물로 점철된 행복의 요람이 바로 우리들이 살아있는 동안 한 순간도 없어서는 안 될 가정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은 갈수록 분열되고 무너지면서 가족 구성원들이 쉼터를 잃고 외로움과 번민과 정신적 황폐 속에 방황하고 있다.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마약, 음주, 도박, 컴퓨터 등에 점점 깊이 빠져든다. 자살도 서슴지 않는다. 치열한 생존경쟁, 극심한 교육열, 황금만능주의, 과학문명의 끝없는 발달 등이 그 저변에 깔린 원인들이다.


뿔뿔이 흩어져 쪼개진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 골방에서 벽을 마주하고 외롭게 살고 있다. 끼니도 햄버거든, 라면이든 집 안팎에서 각자가 알아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핵가족 세태에 집에서 밀려나 병원이나 양로원 신세를 지거나 룸메이트에 더부살이하며 살아가는 노인들도 부지기수다. 죽은 한인 신원미상자나 자살한 한국 기러기 아빠도 제대로 된 가정이 없었다. 한 사람은 도박에 빠져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삶의 막막함과 괴로움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어디 이들뿐인가. 날로 극심해져가는 경쟁사회에, 특히 한인사회에 편히 쉬고 의지할 만한 가정이나 피붙이 한명 없이 쓸쓸하게 살아가는 한인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정이라는 울타리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삶의 원천인 가정을 소홀히 하면 그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불행이다. 튼튼한 가정 만들기, 가정 지키기, 무너진 가정회복에 관한 운동이 한인사회에서 지속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는 가정의 달에 ‘남편의 날’ ‘부인의 날’ 또는 뭉뚱그려서 ‘부부의 날’도 만들어 부부관계를 보듬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인사회의 가정문제가 자녀나 부모가 연관된 것보다 부부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훨씬 많을뿐더러, 이런 세태를 개선시킬 별다른 묘안이 현재로서는 없기 때문이다. juyoung@koreatimes.com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