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

2011-04-2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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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단점을 지적하는 대신 장점을 칭찬함으로써 개인의 잠재력을 극대화시킨다는 말이지만, 동시에 ‘잘 달리는 말조차 채찍질’하는 것을 미덕 삼고 자녀들을 채근하던 우리들을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난 4월 초 조지아주 어거스타 골프클럽에서 꿈의 무대라는 2011 매스터즈 대회가 열렸습니다. 대한민국의 최경주 선수가 아시아인 최초로 그린재킷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TV중계를 보았지만, 그보다 더 관심을 끄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20세 약관의 북아일랜드인 로리 맥킬로이였습니다. 첫 날 경기 후, 이 선수는 선두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하루 동안의 반짝쇼일 것이라고 생각한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3일째를 마친 후에는 2위 그룹을 무려 4타차로 밀어내며 우승 가능성을 한껏 부풀렸습니다. 그러자 전문가들도 그의 우승 가능성을 거론하며 우승 때 작성될 기록들을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타이거 우즈 이후 최연소 타이틀 획득’ ‘4일 내내 선두를 고수한 최초의 우승자’ 등이 신문 1면을 장식할 제목들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경기에 나선 선수 자신도 세계적인 선수들조차 이루지 못했던 꿈을 거의 손에 잡은 듯한 상기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날은 앞선 3일 간의 그 멋진 플레이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겠지요.

결국 몇몇 선수들이 공동선두로 나섰고 경기를 시청하던 나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우승이야 우리의 최경주가 아니면 별 관심도 없지만, “이 선수가 다 잡은 우승을 놓쳤을 때 겪을 실망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하는 오지랖 넓은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12번 홀에서 그는 어이없는 샷을 연발, 거기서만 3타를 잃고 우승권에서 사실상 멀어졌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실수를 연발하면서 고개를 떨구고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우승후보 1순위의 기백은 간 데 없고,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대는 보통 젊은이의 안쓰러운 모습만 남아 있었습니다. 결국 다른 선수가 우승하고 그는 맥없이 경기를 마쳤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쓸쓸히 관중 사이로 빠져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이번 결과가 그의 장래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걱정하며 한숨 쉬던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까지 우승자에게만 축하와 환호만 보내던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그를 향해 우레 같은 박수를 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관중들의 얼굴은 ‘괜찮아. 아주 잘했어. 지난 3일간 보여준 네 모습은 최고였어. 실망할 필요 없어. 너는 할 수 있어. 기대할게…’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비로소 그가 고개를 들고 관중들에게 미소를 보냈습니다. 같은 염려를 했던 관중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지며 그들의 뜨거운 격려가 무너질 뻔 했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는 한 주 후 말레이시아 골프대회에서 시종일관 우승을 다툰 끝에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경기 직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소감은 “수렁에서 빠져 나온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였습니다. 그리고 나의 우려도 끝이 났습니다.

며칠 후 그 감동을 혼자만 품기 어려워 둘째 딸을 붙잡아놓고 잔뜩 폼을 잡고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라고 말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딸 아니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근데 고래가 어떻게 춤을 춘다는 거야, 점프 밖에 못하는데. 무슨 만화영화도 아니고” 하고는 혀를 낼름하더니 “나 할 일 있어”하고는 휭하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순간, 멍한 기분과 함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럴 때도 칭찬을 해야 하는 건가?”

박 준 서
(월드비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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