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개인의 타임캡슐

2011-04-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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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타임캡슐의 내용물은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한 시대의 인간 존재의 증거를 남기기 위하여 그 시대의 갖가지 기록과 산물을 넣어 땅속에 묻는 용기’ 이것이 타임캡슐의 사전적인 뜻이다. 만일 타임캡슐의 내용물을 선정할 때, 캡슐을 개봉할 때 입회한다면 재미있을 것이다. 역사의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는 물건들이 제각기 어떻게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었다는 설명을 듣는 것이 흥미로울 것이다.

왜? 그것들이 바로 인간 역사이기 때문이다.
옷장을 정리하던 어머니가 “이것이 네가 어렸을 때 입던 옷이다” 하면서 아기 옷을 보이자, 장성한 자녀가 달려가서 그것을 몸에 대보고, 뺨에 대보며 즐기던 장면, “내가 세 살 때 그린 그림이 마치 피카소 같다”하면서 자랑하던 대학생은 각자의 성장 과정 일부를 알고 무척 기뻐한 것이다. ‘내가 어떻게 자랐을까’이것을 알리는 것은 성장 기록이며, 개인의 역사다. 인류, 세계, 겨레, 크고 작은 단체의 역사 기록이 중요한 것처럼 개인의 성장 기록도 같은 무게가 있다.


개인의 성장 기록은 각자가 한 일들을 모은 것이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도와야 하지만,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각자가 자료를 모을 수 있다. 4월에 세금보고를 하는 것처럼, 6월에 지난 1년의 정리를 하는 것으로 정해 놓으면 더욱 편리할 것이다. 평상시 모아두었던 각종 작품, 성적물 중에서 더 오래 보관할 것을 선택해서 다른 상자 속에 따로 모아두면 된다. 여기에 기억할 일은 날짜와 특기 사항을 첨가하는 일이다. ‘3월 17일, 4학년 여행에서’라는 기록이 있다면 먼 훗날 기억을 되살릴 때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보관물의 내용은 다채로운 것이 좋다.

상장이나 메달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고받은 편지, 작문, 미술작품, 여행기록, 일기, 성적표, 낙서...등 성장과정을 알리는 물건들은 보관할 가치가 있다. 6.25 동란 후, 허탈해진 이유의 첫째는 인명 피해였고, 둘째는 국가나 개인의 역사물 손실이었다. 쓰나미가 휩쓸고 간 일본에서 아직도 복구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못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다. 쓰레기 더미를 조심스럽게 뒤져보는 사람들이 말한다. “어딘가에 누군가 있을 지도 몰라서...” 그들은 고인이 된 사람들을 아직도 찾고 있다. 또 막대기로 휘저으면서 찾는
것은 없어진 사진들이다. ‘여기 이 사진!’ 그녀는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유물 중에서도 사진처럼 귀한 것이 있겠는가.

“이게 누군지 알아? 나야” 아기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와서 친구들에게 보인 학생이 있었다. 다음 날엔 아예 모두 아기 때 사진 전람회를 열었다. 유치원 때 그림을 보면서 하는 말이다. “참 못 그렸다. 왜 그랬을까?” “글씨가 많이 늘었어요. 어렸을 때 글씨는 아주 엉망이에요” 학생들은 자기 스스로 성장하였음을 인정한다. 지금의 글씨를 10년 후에 그들이 다시 보면서 뭐라고 할까? 이것이 개인의 성장 기록을 보는 재미이고, 바로 수집 결과의 가치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성장하지만 그것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은 사람뿐이다.(아! 참 나무의 나이테가 있지만.) 이 기록은 즐거움을 줄 뿐만 아니라 역사가 되며, 더 큰 비약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타임캡슐을 고안한 사람들의 뜻이 바로 이것일 것이고, 또한 개인사의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국가적인 행사로 타임캡슐을 계획하고, 내용을 선정해서, 땅에 묻고, 기한이 되면 개봉하는 일은 규모가 큰 일이다. 일반인은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입회하거나 보고를 받을 뿐이다. 하지만 개별적인 타임캡슐은 본인이 꾸준히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이 즐겁고, 시일이 경과할수록 값진 성장 기록이 된다. 인류나 겨레의 역사를 개인사의 집합체라고 볼 때, 누구나 역사의 한 분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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