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통령의 무릎과 수쿠크

2011-04-2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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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 기독교에서 일어난 두 가지 특징적인 사건은 이명박 대통령이 기도회 중에 무릎을 꿇은 것과 수쿠크라고 불리는 이슬람 채권법의 시행이 기독교의 반대로 무산위기에 처한 일이다. 이 두 사건은 한국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좋은 도구가 된다. 자연인으로서 대통령도 얼마든지 자기의 종교적 표현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골방에서나 할 일이지 다종교 국가에서 최고 지도자가 공개적으로 보여줄 태도는 아니다. 이 일은 기독교인에게도 덕이 되지 않는다.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신앙을 실천해야 할 기독교가 권력과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과는 상관없다.

대통령을 무릎 꿇릴 정도의 힘을 가진 기독교는 수쿠크법에 대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수쿠크법이란 이자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이슬람 국가의 자금을 들여올 때 통상적인 이자를 지급하는 대신 제3의 방법으로 이자수입에 해당하는 수익을 보장해 주는 방법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기존 금융법도 손봐야 하고 다른 해외 자본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어 이견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금융자본의 이동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해외 자본유입을 위해 다양한 통로를 열어두는 것은 비난받아야 할 정치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계는 정작 토론해야 할 주제에는 관심 없고 이슬람 자본이 들어와 테러 자금이 될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반대하고 나섰고 급기야는 든든한 후원자이던 조용기 목사마저 ‘대통령 퇴진’ 운운하게 만들었다. 이슬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인 ‘이슬람포비아’가 기독교인들 사이에 얼마나 퍼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독교계의 지지를 받고 있던 이명박 대통령이 바로 그 기독교 때문에 주요 정책 하나를 포기하게 되었던 이 사건은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 토론거리를 제공한다. 어렵고 힘들 때 자기가 믿는 초월자에게 의지하는 대통령은 보기 좋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처음부터 의지하였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기독교계의 표였고 교회라는 조직이었다. 초월적 절대자에 대한 믿음과 조직이라는 세속적 구조를 구별 못한 그가 감당해야 할 자업자득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조선조 임금들은 종묘와 사직에 가서 제례를 드림으로 국가의 안위를 기원했다. 이러한 왕의 신앙행위는 백성들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이었으나 곧 종묘사직은 왕조를 의미하는 단어처럼 사용되었다. 종교행위가 왕실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면서 조선조는 성리학을 강화하게 되고 성리학의 강화는 조선 후기 서구문명 앞에서 자신조차 보호하지 못하는 무력한 결과로 나타났다.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선을 넘었을 때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다.

세상 모든 일이 정치라면 종교는 정치에 당연히 개입해야 한다. 그런데 그 개입은 정치가 종교의 본연과 상관없는 방향으로 나갈 때 이뤄져야 한다. 정치가 서민들의 삶을 어렵게 하고 대기업을 편들 때 종교는 본연의 소리를 내야 한다. 정치가 해묵은 남북대결을 조장하며 보수층 표만 끌어안으려 안보위기를 조장할 때 종교는 평화의 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을 무릎 꿇린 것도 모자라 정책마저 포기시킨 그 막강한 힘을 가진 누구도 그러한 말을 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고난을 당하였던 것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이다. 이 기간 권력과 함께 간다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소외된 이들을 위해 걱정하고 기도하는 기독교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김기대 목사 (평화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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