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923년 일본

2011-04-15 (금)
크게 작게
백춘기(자유기고가)

일본 동부지방을 초토화시킨 대지진사건이후 당연히 짚어보았어야 할 일본관동대지진에 대해 한국에서 그리고 미주한인사회에서도 침묵하고 있다. 마치 ‘집단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 같은 어색한 분위기를 느낀다. 그 속사정인즉 일개 한류스타가 십억 원을 내놓을 정도로 고조되어 가는 지진위로금 모금열이 행여 떨어질까 봐! 더욱 가소로운 속내는 지진와중에 보여준 일본인들의 수준 높은 질서의식과 슬픔을 침묵으로 자제하는 인내심을 찬사하는 정서에 금이
가게 하는 언행은 삼가야 한다는 어느 유명인사의 촌평이다.

그 쉬쉬 하는 역사의 현장에 가본다. 1923년 9월1일 정오 일본제국 수도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관동지역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사망자 99,331명, 부상자 110,000명, 행방불명 43,467명, 가옥손실 447,126호, 이재민 350만명. 1923연 9월2일 오후 4시 가또내각 도쿄 시와 그 주변 8개군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다수의 내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상 이스노랜다로와 경시총감 아까이께가 주동이 되어 계엄령을 강행시켰다. 계엄령과 동시에 각 경찰서를 비롯한 공공기관의 게시판에는 이런 포고문이 게시되었다. “조센진(조선인) 내습! 불순세력의 사주를 받은 조센진이 약탈, 방화, 폭동, 살인 등을 자행하고 있다... 일본인은 각자가 자위수단을 강구하라...” 당시 일본은 극심한 경제불황에다가 러시아혁명(공산주의혁명)의 영향을 받은 지식층의 급진좌경화와 노동운동이 급성장하고 있었다.


일본제국주의 정부는 대지진을 기회로 급진적 반체제 불안용인을 제거하기 위한 속죄양으로 조선인을 택한 것이다. 조선인의 배후에 공산주의가 있다고 선동하였다. 군인, 경찰, 우익단체 자경단에 의해 백주 도로상에서 안방에서 골방에서 부엌아궁이 속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특히 도시빈민층의 ‘양아치’들로 구성된 ‘자경단’의 잔인한 살인행위는 일본정부도 당황했다. 이렇게 죽어간 조선인 무려 2만명. 급기야 정부는 조선인 구호라는 구실 하에 2만여명을 검거 수용한다. 이 수용소에서 상당수의 조선인이 불순사상범으로 몰려 고문 끝에 죽어갔다.

지금도 도쿄주변 하천부지에서 조선인의 유골이 집단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일본 근대사·일본지꾸바대학 교수 박동진 저·1985) 이번 일본동부대지진의 반사경에 비친 한국의 일상적인 생활문화가 매도당했다. 매도당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 매도했다. 그것도 도매금으로! 한국은 질서가 없고 동물같이 운다고! 일본은 조형적 포장문화다.

한국은 자연적 개방문화다. 내 새끼가 죽었는데 어찌 참을 것이며 땅을 치고 통곡하는 것 너무 탓하지 말라. 일본사회가 수도원이라면 우리사회는 하루하루가 오일장이다. 너무 내탓 내탓 하지 말라. 식민지 치하에서 길들여진 속물근성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