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2011-04-1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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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이 교실 안에 무엇이 가득 찼을까요?” 학생들이 두리번거린다. “잘 보세요” “...” “냄새를 맡으세요, 맛을 보세요, 만져 보세요” 학생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본다. “그럼, 나처럼 이 방안에 있는 것을 비닐 주머니에 이렇게 채우고 그 입을 꼭 묶으세요” 학생들이 제각기 주머니에 공기를 채우고 그 입을 고무줄로 묶는다. “자아, 만져보세요. 주머니 안에 무엇
이 들어 있나요?” “바람!” “바람은 맞았어요. 공기의 흐름을 말해요. 즉 공기가 들어 있어요. 공기는 사람을 어떻게 돕지요?” 학생들은 공기의 혜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공기는 생명체의 존재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일본이 삼중으로 큰 재난을 맞고 있다. 시작은 대지진과 쓰나미였다. 그런데 현재는 ‘대지진+쓰나미+방사능 유출’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지진과 쓰나미 피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복구될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 유출로 심각한 공포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왜 원자력 발전소를 설치하였느냐는 물음의 답이 깨끗하고 싼 전기를 얻기 위함이었으니 우리는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것들이 하찮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그 중에 사람의 마음이 있다. 고운 마음, 착한 마음, 넓은 마음, 자라는 마음...등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럼, 이런 마음들은 어떤 씨앗을 어떻게 심어서 보기 좋게 자랐을까.


요즈음 세계는 전속력으로 발달하고, 변화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일상 생활이나 의견 교환이나 사무처리를 빠르고 간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대부분이다. 즉 디지털의 세계이다. 이 세상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 것처럼,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세계가 있으며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어쩌다 한 쪽이 강해지면서 다른 쪽이 잘 보이지 않을 경우 균형이 기울 수 있다. 근래의 사회 현상을 마음과 기술의 불균형으로 본다.

트위터를 비롯한 SNS가 없어져버린 개인과 사회적 관계를 이어준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대체물에 지나지 않는다. 기계와 사람의 관계이지 결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아니다. 아주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따뜻한 온기가 부족하다. “손자 만나려고 떠납니다” “매일 인터넷으로 사진을 보고 이야기를 하신다면서...” “아니지요. 실제로 안아주고, 만져보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만나는 것이지요” 맞다. 바로 그것이 인간관계지 않은가.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제각기 방에 들어앉아서 인터넷에 몰두한다면 언제 사랑을 나누는가.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이 모니터의 지시에 따라 문제를 풀고, 그 결과를 채점할 뿐이라면 어떻게 서로 이해하겠는가. 가정이나 사회의 구성원이 서로 대화하지 않고서는 상호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기계가 사람의 마음을 부분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마주 볼 때의 눈빛과, 정다운 음성과, 따뜻한 말에 담긴 사랑과, 가까이서 느끼는 체온을 전할 수 없는 기계일 따름이다.

자녀들은 부모와 같이 하는 시간을 충분히 갖기 바란다. 부모에게서 살아가는 힘이나 방법을 배우면서 자라난 사람들이 생존 경쟁에서 강한 힘을 발휘한다. 학교에서도 교사와의 개인적인 접촉이 잦은 학생들을 이해하기 쉽다. 인간 관계는 보이지 않는 접촉이지만 성과는 확실하게 나타난다. 졸업 후보 학생들과의 개별적인 면담에서 느끼는 것은 이런 기회를 더 많이 마련하여 그들과 좀 더 가까웠어야 했다는 미안함이다.

디지털시대는 우리 생활의 큰 변혁이며, 모든 것이 빨라졌고 편리해졌다. 이와 더불어 인간성이 존중되며, 대화로 마음이 오고 가며, 자기 자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한다면 꿋꿋한 생활인이 될 줄 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인관계의 영향이 성장기의 균형을 잡아주는 영양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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