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체벌의 트라우마

2011-04-0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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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찬(부국장 대우·경제팀장)

긴 머리와 여성스러운 외모 때문에 ‘국민 할매’라고 불리는 록그룹 부활의 기타리스트 김태원이 지난 주 한 토크쇼에서 발언한 것이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켰다.김태원은 10대 시절 방황한 이유에 대해 “초등학교 1학년 입학 첫날 안 씻는다는(지저분하다는) 이유로 따귀를 맞았다”며 “칠판앞에서 교실끝까지 몰려가면서 맞았다. 아픈 것은 둘째 치고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이후 학교를 잘 가지 않았다.”며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를 병적으로 싫어했다”고 담담히 전했다.

이 방송이 나간 뒤 인터넷에서는 난리법석이 났다. 자신이 학창시절 맞았던 경험들이 쏟아져 나온 것. 대부분 체벌의 부당성을 지적했고, 당시의 분노와 굴욕을 되새김질하는 모습이었다.체벌이나 폭력은 피해자에게 지울 수 없는 굴욕을 남긴다. 트라우마(trauma)라고 한다. 심리학적으로 ‘정신적 외상’,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을 말한다. 체벌로 인해 친구
들 앞에서 창피했던 자신의 모습은 영원히 잊지 못하는 굴욕으로 남는다. 또 체벌이 부당하다고 느껴도 ‘문제만 커지니 반항하지 마라. 졸업때까지 참아야 한다’는 식의 현실은 정신적인 좌절을 심어준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한국의 중고생 6,6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전체 응답자의 70%가 체벌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같은 설문에서는 25%의 어린이가 체벌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체벌이 비인격적이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교사나 부모들은 훈육의 한 방편으로 손쉽게 매를 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체벌에 대한 찬성 논리도 적지 않다.한국에서 초·중·고교를 다니고, 군대까지 갔다온 남자라면 체벌이나 구타, 폭력에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심지어 자신이 얼마나 혹독하게 맞았는지 무용담처럼 자랑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항할 힘(사회적으로)이 없는 청소년에게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를 남기는 것이 과연 정당한 교육일까.

사실 지난해 서울시교육청이 유치원과 초·중·고교에서의 체벌을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했을 때 무척 놀랬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학교 체벌이 합법적이라니. 지금쯤이면 체벌은 당연히 금지된 상태이고, 일부에서 개인적으로 체벌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다. 체벌 전면 금지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대안이 없지 않느냐’며 이를 정치적인 쇼로 몰아붙인다.

얼마전 한국의 교육 관계자와 체벌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체벌은 필요악이라는 얘기였다. 교육자로서 안타까움은 있지만 교육현장에서 체벌이 없으면 학생들을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학교내 교권 침해 사례를 들며 체벌이 이를 예방하는 수단이라고 강변했다.하지만 원칙적으로 체벌이 옳지 않다면, 체벌외의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일단 교사
가 진심어린 충고를 해보고 다음 단계로 경고를 하든, 부모에게 알리든, 정학, 퇴학 등의 수단을 찾아야 한다.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체벌도 가능하다면, 솔직히 말해, 차라리 때리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제도적인 틀이 필요한 것이다.

80년대 군대에 있을 때 구타 금지에 대한 공문이 자주 내려왔다. 구타로 인한 문제가 생기면 처벌한다는 제도를 알리고, 이에대한 지속적인 홍보를 하다 보니 점차 구타행위가 줄어들었다. 기본적으로 하지 말라고 하면 생각도 바뀌는 법이다. 미국에서 체벌 금지에 대한 원칙은 강력하다. 미국에서는 교사와 교장의 경고, 정학, 퇴학, 심지어 경찰 수사 등의 방법을 통해 교권과 교내 질서를 잡는다. 체벌 외에 교내 질서를 유지하는 다른 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연 미국의 청소년들이 한국의 청소년보다 더 착해서 체벌을 안해도 말을 잘 듣는 것일까. 현실적으로 미국과 한국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고, 비인간적인 체벌을 배제한 방법을 찾는 것이 교육자와 교육 관계자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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