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노조를 바라보는 시각

2011-03-24 (목)
크게 작게
박원영(경제팀 차장대우)
최저임금과 수당을 지불하지 않은 이유로 브루클린 지역 수퍼마켓들이 종업원들로부터 집단소송을 당했다. 인근 한인 청과상도 같은 위기에 놓였다. 업주와 통화를 했더니 “법을 어긴 적이 없고 노조의 회유에 직원들이 넘어간 것 같다”는 응답이었다. 실제로 이들을 지원하고 있는 것은 로컬 노조다.

이런 취재를 할 때마다 늘 2001년 여름이 생각난다. 막 수습기자 딱지를 땐 후 처음 취재해 본 사건이 맨하탄 한인 델리에 대한 노조의 시위였다. 당시 업주의 태도는 강경했었다.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빨갱이 같은 노조에 굴복하진 않겠다”는 자세였다. 여전히 60년대스런 그 분의 사고가 답답하긴 했지만 시위를 지켜보면서 “아, 여긴 노조가 좀 다르구나”라는 걸 실감하기도 했다. 그들은 시간 맞춰 시위하고 주말과 비오는 날은 쉬었으며 업주를 찾아와 협상도 했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몽둥이로 맞아가며 생존권 수호을 외치는 절
박한 시위현장만 한국에서 보아온 사람으로서 낮선 광경이었다.

기자에게 오랫동안 ‘노조’라는 단어는 약자, 핍박, 희생, 진보 등과 연결되어 있었다. 80년대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쌍용자동차 노조가 무자비하게 유혈진압 당한 것이 불과 2년전이다. 전교조 출신은 여전히 한국에서 높은 자리에 못 올라간다.


그런데 미국에서 10년 넘게 살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이곳의 노조는 철저히 조합원들만의 이익을 쫓는 집단이며 절대 약자가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그게 바로 가장 이상적인 노조의 모습이 아닐까? 노조는 그러려고 만드는 것이다. 노조(특히 공공노조)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준 단적인 사례가 지난해 워싱턴 DC 시장 선거였다. 교원노조는 교육감 미셀 리를 지지하던 기존 시장을 예비선거에서 날려버리고 자신들이 밀던 후보를 새 시장으로 만들었다. 이런 힘 때문에 노조는 진보가 아닌 가장 반동적인 집단이 되기도 한다. 교원노조가 학생들의 교육환경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어떤 개혁도 막는다는 비난을 받는 것은 스스로가 자초한 부분이 크다.

지난달 위스콘신의 스캇 워커 주지사와 공공노조가 극한 대립을 벌였을 때, 주시사의 의도가 순수한 예산삭감이 아닌 민주당의 핵심 지원조직인 노조의 무력화라는 것을 알고 있는 리버럴들조차도 일부 공감했던 것은 노조의 지나친 집단이기주의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극심한 재정난, 구직난 시대에 고용이 안정된 공공노조가 연금, 의료, 임금 등 어떤 부분도 양보를 못하겠다고 버티면 어떻게 일반 대중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겠는가? 워커 주지사가 노조의 핵심 권리인 단체교섭권을 없앤 것에 찬성하는 건 아니다. 노동법을 준
수하지 않는 한인 업주들을 편드는 것도 절대 아니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