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강남좌파와 체 게바라

2011-03-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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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병 임(논설위원)
5일 한 부음이 떴다.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 1929~67)의 친구로 남미대륙 횡단 여행의 동반자였던 알베르토 그라나도가 아바나에서 향년 88세로 사망한 것이다.죽마고우인 그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의대 동문으로 1953년에 ‘라 포데로사’라는 이름의 오토바이를 타고 8개월간 남미 대륙을 횡단하며 칠레와 콜롬비아, 페루, 베네수엘라 등을 둘러봤다.여행길에서 남미 각국의 주민들이 기본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고 가난에 찌들어 사는 모습을 목
도했고 여행을 마친 게바라는 탄탄대로인 의학도의 길 대신 억압과 착취에 시달린 민중들을 위해 혁명가의 길을 택했다.그라나도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아르헨티나, 쿠바, 베네수엘라 등 게바라와의 여행길에 유해를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오래 전에 전설이 된 인물 체 게바라가 그의 친구 죽음으로 다시 다가온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한마디로 정리했다.“나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쿠바에서 싸웠고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었다”고, 부언하자면 “그리고 볼리비아 혁명 현장에서 한창 나이인 39세에 죽었다”고 하겠다. 그렇다, 그는 땀
과 먼지 속에 살다 죽어서 영웅이 되었다.카스트로를 도와 쿠바 혁명을 이뤄낸 뒤 안주하지 않고 볼리비아 반군 지도자로 정부군과 전투 중 부상 입은 채 산중 오두막집에서 죽었다. 그의 영향은 생시보다 죽어서 더욱 커졌다.
20세기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된 이미지로 손꼽히는 체 게바라의 포스터는 우리에게도 낯익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장발인 게바라가 베레모를 착용한 모습은 라틴 아메리카 뿐만 아니라 그의 활동영역이 아닌 유럽과 미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1981년 극단 현대극장이 초연한 뮤지컬 ‘에비타’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본 적이 있다.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마오”란 에바의 노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무대에 올려진 ‘에비타’는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등장하는 정치성 있는 뮤지컬이었다. (그때 체 게바라 역을 가수 조영남이 했다. 그야 뮤지컬은 노래 우선이니까.) 겨우 7회 공연하고 군사정권에 의해 막 내렸다가 87년 6월항쟁, 민주화를 이뤄낸 88년부터 체 게바라의 인기는 돌풍을 일으켰다. 장 코르미에 저 ‘체 게바라 평전’을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진심이든, 지적 허영이든 들고 다녔고 뮤지컬 ‘에비타’도 다시 막을 올렸다.


새삼 그를 기억하며 요즘 한국에서 빈번하게 회자되는 강남 좌파를 떠올려 본다. 3, 40대부터 50대까지 고학력 전문직(교수, 의사, 법조인, 엔지니어) 종사자들로 80년대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을 직접 체험한 이들이 현재 사회의 중심이다. 아파트나 땅을 갖고 있어도 상속세를 더 많이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있는 사람 티를 내지 않고 없는 사람을 위한다고 한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더라도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좌파와는 거리가 멀다. 인터넷, 트위터를 통한 대중과도 활발히 소통한다. 이들은 열심히 대치동 교회나 성당에서 홈레스 밥봉사도 한다.강남좌파들의 저변 확대는 날로 커지고 내년 총선과 대선 정국을 앞두고 이들의 말과 행동이 주목된다. 명품 의상 입고 와인잔 기울이며 ‘돈 없고 힘없는 서민들 가여워’ 하며 세태를 논하기만 할뿐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이들도 일개 특권층일 뿐이다.
그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가 바뀌는 일은 없겠지만 사회지도자층인 이들이 ‘부모 돈으로 유학 했으니 상속재산은 사회적 환원을 하겠다’는 행동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체 게바라도, 강남 좌파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현재 한국을 뒤집어놓은 끈적거리고 불쾌한 ‘상하이 스캔들’을 대하면서 머리를 맑게 헹구고 싶었다. 신념과 지적, 독창적, 금욕적, 인간적 이런 단어를 머리에 채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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