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막의 라이언’과 카다피의 진실

2011-03-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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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 석(한인유권자센터 상임고문)

20세기 미국 시대극의 영원한 주연배우 ‘안소니 퀸’은 미국 뿐만 아니고 한국의 7080세대들에게도 헐리우드영화의 진수를 전해준 가장 대표적인 배우로 통한다. 안소니 퀸이 주연한 영화중에 ‘노틀담의 꼽추’ ‘25시’ ‘노인과 바다’, ‘나바론의 요새’ ‘율리시스’ ‘바라바’ ‘스팅 3’ 등이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필자에게는 단연 ‘사막의 라이언’이다. 사막의 라이언은 리비아의 독립영웅인 ‘오마르 무크타르’의 영웅적인 투쟁을 그린 실화
이다.

무크타르는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어린이들에게 코란을 가르치던 선생이었다. 1910년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침공하자 그는 분연히 일어섰다. 사막의 나라에서 모래알같이 흩어져 서로 반목하던 이슬람 부족들을 하나로 결집시켜 신식 무기로 중무장한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20여년 항쟁을 이끌었다. 무크타르와 그의 군대는 비록 구식소총에 정규 훈련도 받지 않았으나 무크타르의 용병과 유목
민 특유의 용맹성으로 침공군 사령관을 5명이나 갈아치우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이탈리아 본국을 불안에 몰아넣었다. 20년 동안 항쟁을 이끌어 온 무크타르가 끝내 이탈리군에 잡혔다. 그는 최후를 맞으면서도 불의와 타협은 거부했다. 1931년 공개 교수형에 처해지며 “외세에 대한 투쟁은 다음 세대, 다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것이다”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1970년대 중. 후반, 당시 한국의 지식청년들에게 화두는 ‘민족과 외세’였다. 20세기에 우리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의해서 민족역량이 거의 거덜이 난 상태였고,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된 후에도 제국주의의 먹거리로 남겨진 상황을 비탄스럽게 한탄하는 지적인 패배감이 대학캠퍼스의 정서였다. 필자도 이러한 상황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조국근대화’를 위해선 중앙집권적 독재 권력이 필요악이었고 먹거리를 위해선 외국자본이 절대적이었다는 논리가 지금까지도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여하튼 당시 한국에서 제국주의, 외세, 민족 등을 언급하는 것이 절대 금기였다. 그런데 한창 중동진출이 시작될 때에 ‘리비아 대수로건설’프로젝트를 동아그룹이 수주를 했다. 리비아의 가다피대통령은 동아그룹과의 계약조건으로 한국에서 ‘사막의 라이언’이란 영화를 상영할 것을 조건으로 세웠다. 제국주의에 맞서 영웅적으로 투쟁한 리비아 독립영화의 내용을 당시 한국의 지배계층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조국근대화를 위해서 프로젝트를 수주해야 하겠고, 반면에 조국근대화를 위해서는 ‘사막의 라이언’의 한국 개봉을 허용하면 안 되겠고 가 당시의 아이러니였다. 결국엔 아주 조용하게 슬며시 ‘사막의 라이언’을 서울서 상영했다. 당연히 필자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최악의 테러리스트로만 알았던 ‘가다피’를 영화 ‘사막의 라이언’을 통해서 다른 짐작을 하게 되었다. 꼭 30년 전의 일이다. 아랍권을 결집해서 아랍연맹의 총수가 되고자 했던 카다피가 시대의 흐름에 무지했다. 그가 서방권의 주변을 기웃거리며 미국을 노크했을 때엔 이미 그의 국민들은 그를 버렸다. 카다피는 자신을 종종 리비아의 민족 영웅인 ‘오마르 무크타르’와 동일시하며 42년간 리비아를 장악해왔다. 자신의 정치적인 운명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놓인 지금, 그는 다시금 무크타르를 떠올리며 성난 국민들에게 마지막 호소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무크타르의 투쟁은 오직 조국을 침탈한 제국주의만을 향했었다. 동족을 향해서 총부리를 겨누는 카다피에서 무크타르를 볼 리비아인은 이제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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