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재스민과 트리폴리, 광주

2011-02-2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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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오래 전 베이사이드 집에 살 때 키 큰 재스민 화분을 하나 사다가 거실에 놓았었다. 한두달 후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는데 은은하고도 감미로운 향내가 온 집안에 진동을 했다. 그야말로 물 흐르듯 부드러운 향이 가슴에 파고들어 이 향의 진원지가 어딘가 하여 살펴보니 바로 재스민 나무에 온통 조그맣고 하얀 꽃이 화사하게 피어올라 온 집안을 향기롭게 만든 것이었다. 재스민 나무는 피었다 지고 다시 피며 참으로 오랫동안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했었다.

그 소박하고 앙증맞게 작은 재스민 꽃다발을 들고 거리에 나온 튀니지 시민들이 무혈혁명을 이뤄내 23년 장기독재한 벤 알리 대통령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그래서 북아프리카 중앙부 지중해에 면한 공화국 튀니지의 국화(國花) 재스민은 민초들의 민주화 함성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이‘재스민 혁명’(Jasmine revolution)은 오랜 독재와 빈곤에 시달려온 중동 지역을 흔들고 이어 중국을 비롯 아시아권에도 스며들고 있다.청과물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26)의 분신사건이 트위터와 페이스 북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간 것을 시작으로 튀니지가 일어났고 30년 독재를 휘두른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도 물러났다. 예맨도 30년간 집권해 온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을 퇴진하라고 2주 가까이 반정부 시위 중이다.

리비아에서는 42년째 장기집권 중인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가 24일 현재 트리폴리시에 친위병력을 속속 집결시키고 있다. 이미 수많은 시민들이 무자비한 진압 앞에 피를 흘리고 죽어갔다.카다피가 유전도 폭파하라 했다는 소식에 미국 금융시장은 금리 및 주가가 크게 하락하고 국제 유가는 큰 폭 상승했다. 리비아 사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고품질 리비아산 원유공급이 부족되면서 유가는 더욱 급등할 것이다. 그러면 휘발유값이 오르고 항공요금이 인상되고 가계 소비는 위축되고 살림살이는 더욱 팍팍해질 것이다.


전운이 감도는 트리폴리시를 지켜보면서 한국민에게 가슴 아픈 이름 광주를 생각한다.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들이 쿠데타를 주도한 보안사령관과 신군부 퇴진, 계엄령 철폐를 들고 거리로 나왔었다. 처음엔 광주 폭동으로 불리다가 광주사태, 다시 5.18광주 민주화 운동, 광주 민중항쟁으로 공식 재평가를 받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1980년 5월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아니 서울 시민이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가. 우리들은 모두 눈멀고 귀먹고 입 다물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헛소문과 루머 속에 속절없이 입 봉하고 있던 우리들, 그래도 한 독일 외신기자가 남몰래 촬영한 비디오가 전 세계에 5.18의 실상을 알렸다.

이번 재스민 혁명의 시발점도 소셜 네트워크의 공이다. 젊은 세대들은 유투브,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를 적극 사용한다. 국가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중앙아시아의 통제자들은 인터넷을 통제하고 폐쇄하지만 한번 재스민 향을 맡아보라. 그 이국적이고 감미로운 향을 좀체 잊지 못할 것이다. 자유의 꽃향기는 아무리 꽁꽁 싸매어도 퍼져나간다.요즘 세계 언론은 ‘사라지는 독재자들-북한도 뒤를 이을까’하며 북한을 주시하고 있다. 북한은 극심한 식량난이 고질화 되어 배고픈 인민군, 북한 주민들이 계속 탈영, 탈북 중이다.

‘배고픈 데는 장사 없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배고픈 것은 참을 수가 없고 사람이나 짐승이나 배가 고프면 화가 난다. 결국 현재의 재스민 혁명은 배가 고파서, 먹고 살기 힘들어서 터진 것 아닌가. 오바마 대통령은 23일 리비아 사태 해결을 위해서 전 세계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수적이라 했다. 리비아 사태뿐 아니라 배고픈 북한을 지켜보며 우리는 어떤 목소리로 힘을 보태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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