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양 속의 조화

2011-02-0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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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효 섭(아동문학가/목사)

금년 세계 각국 수령들의 연두교서는 사전에 입이라도 맞춘 듯 ‘조화’를 역설하고 있다. 모든 지도자들이 정치나 경제나 이제는 조화를 이루는 것이 세계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공감한 것이다. 20세기는 서로 물고 찢는 피투성이의 100년이었다. 그런 싸움의 역사를 통하여 인류는 공존이 대립보다 낫다는 진리를 배웠다. 공존이란 곧 조화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뉴욕에서 목회하고 뉴저지에 살면서 조지 워싱턴 다리를 13년간 건너다녔다.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것도 사실지만 뉴욕 쪽에서 뉴저지의 암벽을 바라보는 아름다움은 차가 막히는 짜증을 삼키고도 남았다. 그래서 나는 그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는 값으로 갈 때 2달러, 올 때 2달러, 날마다 4달러씩 버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요즘 한국의 텔레비전은 막간(幕間) 순서로 음악과 함께 한국의 경치를 보여준다. 참으로 아름다운 한국이다. 역시 ‘조화의 미’인 것이다. 예술은 한 마디로 조화의 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미국의 아름다움과 가치도 다양한 색채의 조화에서 온다고 본다. 다양한 인종, 복합문화는 단일 민족, 단조로운 문화보다 더 깊은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것이다. 하모니(화음)를 피풀스 사전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화음이란 서로 다른 소리들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다. 그래서 더 자연스럽고 발전된 새 질서를 창조하는 음악 형성의 3대 요소 중 하나이다.” 내가 전체의 화음을
조성하는 하나의 작은 소리가 되는 것이 민주시민의 길이며 소위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는 것이다. 미국을 ‘샐러드 볼’로 표현하는 것도 다양 속의 조화를 가리킨다.

링컨의 연설(1858년)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 그와 같이 나는 주인이 되고 싶지도 않다. 그것이 민주주의 이념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노예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남을 부리고 명령하는 주인 격에 자기를 올려놓으려고 한다. 나는 ‘엘리트’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학벌이나 재력이 좀 있으면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잘난 척하고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는데 그들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자들인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 권위주의는 없어야 한다. 가정에서도 아버지나 남편이 권위주의로 가족을 다스려서는 안 되며 회사나 교회에서도 사장이나 목사가 권위주의로 사원이나 교인을 다스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까지도 제자의 발을 씻어주는 낮은 자세를 취하지 않았는가!

링컨의 일과 속에 ‘대중과의 공동 목욕’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그는 거의 날마다 평시민을 만나는 시간을 가져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였다. 이것을 몹시 단순했던 옛 이야기라고 웃어넘길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시행하려는 링컨의 신념을 봐야 할 것이다. 에디슨의 발명 가운데 ‘전기 투표 계수기’가 있었다. 국회에서 매 의원이 투표함까지 나갈 것 없이 앉은 자리에서 단추만 누르면 투표가 되고 집계까지 되는 기계이다. 그러나 이 기계 구입 문제를 국회에서 논의한 바 절대 다수로 부결되었다. “그런 기계를 들여놓으면 토론 시간이 줄어들고 얼른얼른 표결에 붙여질 가능성이 있다. 그 결과 소수파의 의견이 충분히 토의될 기회가 적어질 것이다.”는 것이 부결된 이유였었다고 한다. 그래서 에디슨도 국회를 상대로는 돈벌이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수파가 소수파의 의견을 지긋이 들으며 자기의 의견을 밀고 나가는 인내의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다. 수만 많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얕은 생각 때문에 무리가 생기고 사람을 무시하고 모두를 기계로 만드는 모순이 생긴다. 가정에서도 힘이 없는 노인이나 재력이 없는 아이의 의견도 존중하고, 사회 기관이나 교회에서도 여성이나 소수의 의견을 충분히 듣는 훈련이 곧 민주주의 훈련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결국 조화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음식의 조화,감정의 조화가 깨져도 사람은 병들게 되어 있다. 건강이란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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