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집트 사태와 미국의 오명

2011-02-0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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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 석(한인유권자센터 상임고문)
1953년 미국의 CIA가 이란에 왕권을 확립했다. 10여 년 전 왕위에 등극한 ‘레자 팔레비’왕은 미국의 힘을 등에 업고서 이란의 서구화를 추진했다. 당연히 이슬람의 반발에 부딪혔고 팔레비 왕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란의 이슬람 지도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이란 민중들은 팔레비 왕의 파격적인 조치에 반발하며 거리로 나왔다. 1963년, 이슬람 지도자 호메이니가 폭동을 일으켰다. 팔레비는 호메이니를 체포해서 외국으로 추방해 버리고 말았다. 물론 미국의 묵인 하에 이렇게 했다.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호메이니는 전 세계의 반미 이슬람세력을 결집하며 투쟁을 이어갔다. 마침내 부패한 팔레비 왕정체제를 무너뜨리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팔레비 왕은 망명길에 오르게 되고 이슬람 지도자 호메이니가 권력을 잡아서 이란에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했다. 최고 지도자 호메이니는 반미노선으로 이슬람 율법을 헌법으로 제정하고 신정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1970년대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1973년 시리아와 함께 이스라엘을 공격했지만(제4차 중동전쟁) 결국엔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맺어서 시나이반도를 돌려받고 1979년에 워싱턴에서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 이스라엘 총리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슬람권 구심역할을 했던 사다트 대통령은 친이스라엘로의 변절로 과격한 이슬람원리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1981년, 당시 부통령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대통령이 되었다. 사다트의 친 미국. 친 이스라엘 정책을 고수해 오는 무바라크는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와 지원으로 30년간 권력을 이어오고 있다. 덕분에 미국은 이집트를 아프리카와 중동지역내 미국의 가장 든든한 전진기지로 삼아오고 있는 중이다. 지난 30년 동안 무바라크는 이집트내의 반서구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추방하고 처형했다. 이집트의 이슬람지도자들은 주변국으로 피신해서 아랍권내 미국의 지원을 받는 정권을 전복시키는 작전을 수립하고 수행하고 있다. 이들은 이란, 수단, 예멘, 아프카니스탄, 시리아, 요르단에 근거지를 두고 테러리스트들을 양성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은 패권유지를 위해 세기의 독재자들을 지지하고 지원해 왔었다. 레이건 행정부의 대 한국과 필리핀의 정책은 결국 대실패로 끝났다. 레이건대통령은 마르코스를 끝까지 고집했지만 필리핀의 피플 파워는 그를 내 쫓아냈다. 광주학살을 자행하고 대통령직에 오른 한국의 전두환을 레이건대통령은 워싱턴서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인권을 무시하고 언론을 탄압하는 전두환 독재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1987년 대규모 시민투쟁에 의해서 전두환은 집권을 연장하지 못하고 권좌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집트에서 무바라크의 30년 철권통치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 제 나라 민중들의 신앙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미국의 압력으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존속시키고 아랍권과 싸우는 서방국가들을 지원하면서 반발하는 국민을 억압하는 통치를 해왔다. 5년씩 6번을 연임해 온 장기독재에 반발하는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목표는 무바라크 퇴진이다. 이집트 사태에 가장 당황하고 있는 곳은 백악관이다. 이집트의 반미권력은 미국에겐 최악의 시나리오다. 무바라크 지지철회를 완벽하게 선언하고 ‘독재권력지지자’란 오명을 다시 뒤집어쓰면 안 될 일이다. 국익을 위해서도 인류 보편적 가치인 ‘인권’에 원칙을 적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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