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월은 기다리지 않는다

2011-01-2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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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한국문학의 거목 박완서님이 돌아가셨다. 나이 40세에 등단하여 40년동안 수많은 작품으로 많은 이들의 상처를 감싸고 위로하며 종내는 아름다운 세상 살기 희망을 품게 하신 분이다.‘나목’,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아주 오래된 농담’, ‘친절한 복희씨’, ‘그남자네 집’,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 6.25전쟁을 비롯한 한국 현대사를 아우르고 80년대 이후 여성문제를 따스하고도 예리하게, 때로 농담처럼 풀어낸 소설들이다.많은 후배 작가들을 비롯한 문화인, 언론인과 종교지도자, 정치인까지 애도의 마음을 보내고 있다. 그분과 일면식도 없는 일반 서민들의 애도하는 마음도 그들보다 크면 컸지 덜 하지 않다. 사실 나는 그 분을 잘 모른다. 별다른 추억거리가 없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이 서울에 가면 한번 경기도 구리시 아치골로 찾아가 뵈어야지 하다가 실제
로 서울에 가면 시간이 없기도 하고 반가와 하실까, 바쁘실텐데 싶어 망설이다 그냥 뉴욕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이번 겨울에도 그분에게 보낼 명화카드를 담을 박스만 준비해놓고 ‘크리스마스에 보내야지’하다가 시간을 놓치고 ‘설날 전에는 꼭 보내야지’ 하다가 부음소식을 들었다.박완서님과의 인연은 십 오년 전, 당시 ‘여성포럼’ 연사로 온 그분을 맨하탄 한인 호텔에서 만나 인터뷰를 했었다. 그런데 그분은 내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셔 이후에 내 글을 읽고 좋은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었다.그래서 구리시의 아치골로 댕큐 편지를 쓰면서 메트 뮤지엄에서 사온 샤갈과 마티스 명화 카드 박스를 함께 부친 것을 시작으로 그분과 끊어질 듯 가는 실 같은 인연이 시작되었다.“보내준 명화카드를 아주 요긴하게 잘 썼다”는 편지를 받고 그 말이 고마워 “연말이면 보내드려야지” 한 것이 1년에 단 한번 연말에 카드와 명화카드를 보내드린 것이 15년이 되었다.

박완서님은 답장을 해주시면서 새로 발간된 책이나 <박수근 유작전>에 가서 사온 박수근 그림엽서 세트를 보내주시며 잔잔하고 따스한 정을 내게도 나눠주셨다.그동안 크리스티 경매장에서는 박수근의 판화 한 점이 나온 적이 있었다.
나는 900달러부터 시작되는 그 판화를 꼭 사고 싶어서 생전 처음 경매에 참여했다. 번호판이 쓰인 팻말을 들고 가슴 두근거리며 경매에 참여했는데 경매가가 나의 수중에 있던 2,000달러를 넘어가자 포기한 적이 있다.그 판화는 정말 사고 싶었던 것이 박완서님이 나이 40에 데뷔하며 쓴 소설이 박수근의 이야기
를 다룬 ‘나목’이었고 판화 어딘가에 위대한 작가의 손길 한 자욱, 호흡 한자락을 느낄 수 있지 않나 해서였다. 그해 박완서님께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박수근 판화 경매 참여 이야기를 쓴 것은 물론이다.

이번 설날 전에 뮤지엄에 가서 카드를 사오려고 했는데,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크리스마스나 연말 전에 그림엽서를 보냈었더라면, 돌아가시기 전 뉴욕의 바람과 공기가 들어간 소포를 받으시고 희미한 미소 한자락이라도 짓지 않았을까 싶어 왜 이리 내 행동이 느려 터졌을까 후회가 된다. 15년전에 두 번 만난 이후 전화를 한 적도, 마주보며 차 한잔도 마시지 못한 채 그분은 떠나고 말았다.뭐가 그리 어려웠을까? 뭐가 그리 힘들었을까? 망설이는 사이에 시간은 갔고 세월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지나고 나면 늘 후회뿐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만날 일이다. 머뭇거리다가 청춘이 가고 세월이 가고 그리운 이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다른 세계로 간다. 아직 다행이라면 10년 전부터 연말이면 편지가 오가면서 정작 한번도 만나지 못한 분이 한명 있다. 서로 ‘보고싶다’는 말만 할 뿐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봄에는 버지니아로 그분을 만나러 갈 예정이다. 정말 더 이상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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