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박완서 선생님을 기리며

2011-01-25 (화)
크게 작게
임혜기(소설가)
그분이 세상을 떠났다. 새 작품을 접할 수 없구나 하는 섭섭함이 먼저 떠올랐다. 그분의 책은 항상 읽을거리로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난 박완서 선생님은 나의 롤모델이었다. 늦은 나이에 소설을 쓰겠다고 나선 모든 여인들에게 그분은 롤모델이었을 것이다. 소설의 흡입력과 탁월한 문장력, 감탄이 나오게 하는 표현과 어휘선택이 글을 쓰고자 꿈꾸는 이들의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팬으로서, 존경하는 작가로서 그리고 선배로서 그 분을 만난 추억이 있다. 오래전 한국일보 기자로 서울을 가면서 작가탐방 기사를 만들 기회가 있었고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골라 인터뷰 했는데 선생님도 그중 한 분이었다. 댁에서 마주한 그분은 감상은 글로 만들어 털어내고 말하기는 잊은 분 같았다. 고개만 끄덕이면서 상대방 말을 조용히 들어주려고만 했다. 가장 못난 인터뷰어가 상대의 말을 끌어내지 못하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이라는데 내가 바로 그 꼴이었다. 그분은 미국에 언제 갔지요? 미국 사는 것이 좋아요? 내가 오히려 인터뷰를 하네. 하며 소리없이 웃기도 했다. 앞서보낸 아들에 대한 집요한 사랑으로 고통마저도 혼자 독차지 하고파 한 방울의 고통도 내비치기 싫다는 아들의 사고사에 대해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병원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 함께 했던 김 교수님이 우리 집을 다녀간 직후라 내가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것에 마음을 열어주는 듯 했다. 그 분은 아들의 죽음은 배신에 가까웠다면서 “나는 정말 앞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라고 절실하게 말했었다.

뉴욕을 그분이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수필 쓰는 이 모 씨 집에 머물렀는데 전화를 해서 선생님을 찾자 이 모 씨는 바쁘시다며 전화를 끊으려 했다. 안부만 여쭙겠다 해도 전해 줄께, 하더니 전화를 그냥 끊었다. 그 일로 기분이 상한 나는 선생님과 친한 모 소설가에게 내 마음속에서 이모 씨와 더불어 박완서 선생님도 지워버렸다고 선언을 했다. 그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내가 서울에 가자 나를 집으로 초대해 주었다. 모른 체 하면 되는 일인데 함께 밥을 먹자며 불러 주었다. 좋은 사람과 함께 오라고 해서 시인 문정희씨가 좋아라 함께 가주었고 우리는 맛있는 점심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늘 점심을 또 얻어먹겠다고 벼르고 살았는데 홀연히 세상을 하직하셨다는 것이다. 이제 아드님과 만나 사진처럼 함박같은 웃음을 지으실까. 그분은 글쟁이 노릇에서 놓여날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해방감을 맛본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었다. 아, 선생님, 이제 그곳에서 황홀한 해방감을 누리시는지요.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