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눈 내린 날에

2011-01-2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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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 (수필가)
창밖으로 하얀 눈이 펄펄 내리고 있다. 보기에도 탐스러운 함박눈이다. 어제부터 TV에서는 눈이 내릴 거라는 방송을 하더니 눈이 정말 눈이 내린다. 집안에 갇혀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지난날의 회상에 젖어든다. 중학교에 들어갔던 첫해에 십리 길을 걸어 통학을 했었다. 눈 내리는 날은 춥고 힘이 들었으나 눈 온 뒤의 날씨는 포근해서 운치가 있었다. 엷은 햇살에 반짝이던 하얀 눈길과 걸을 때 마다 뽀드득 거리던 발자국 소리,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시야, 길가에 서있던 앙상한 아카시아 나무 가지들이 수정처럼 눈부신 얼음을 덮고 반짝이던 신비함. 그런 겨울날의 낭만이 추위를 잊게 했다.그런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마음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친구 어머니가 하던 풀빵 가게였다. 그 친구는 유달리 하얀 얼굴에 키와 몸이 컸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눈 내린 날, 학교가 끝나고 친구 어머니가 하는 풀빵 가게 앞을 지나치려면 왠지 죄를 지은 것처럼 송구스러웠다. 아마 친구 모습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추운 겨울날, 주름지고 초췌해 보이던 친구 어머니가 빵을 굽고 있다는 것이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군침을 돌게 했던 단팥빵 냄새가 내 발길을 멈추게도 했지만 그저 절만 꾸벅 하고 지나치지 못했다. 하얀 눈길과 천막 같던 노점 풍경이 을씨년스러워 내 마음이 더욱 추워질 것 같아서였다. 버스가 오면 타려고 손 안에 쥐고 있던 돈을 만지작거리다가 풀빵 한 봉지를 사고는 했다. 제
발 그 친구와 그곳에서 얼굴을 마주치지 않기를 빌면서. 한 손으로 무거운 가방을 들고 따뜻한 빵을 먹으면서 눈길을 걷던 행복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요즘 내가 잘 가는 마트에 붕어빵을 굽는 코너가 있다. 눈 내린 날, 장보러 갔던 나는 누런 봉투 속에 붕어빵을 사서 들고 나왔다.고생길을 헤쳐 나가려고 빵을 굽고 있던 친구 어머니의 생존이 깊이 베였던 빵. 따뜻한 온기가 소녀의 추위를 덮여주던 눈길위에서 먹던 빵. 어머니가 “너무 맛있다.”며 맛있게 잡수시던 차디찬 빵이 아니어서 일까. 운전석에 앉아서 그 빵을 혼자 먹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나간 시절이 서러워서였을까, 그리워서였을까.

눈 내린 날, 긴 털 장화를 신고,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가 하얀 눈길을 걸어 보았다. 예전같은 감성은 가질 수 없었으나 지난날의 회한에 젖어 들었다. 빵을 굽고 있던 친구 어머니의 빵을 좀 더 사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삶은 발전하여 편리해졌고, 풍요로운데 마음 속 눈길은 그 시절 그대로 머물러 있다. 언제든 내가 원하면 하얀 발자국을 따라 그 모습 그대로 와줄 심지(心地)굳은 친구를 갖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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