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인생에 한명쯤은

2010-10-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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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얼마 전 직장 동료가 한국의 예능프로 ‘유재석·김원희의 놀러와’를 몇 번이나 ‘강추’하여 CD를 빌려보면서 뒤로 넘어가게 웃다가 쓸쓸해지기도 하면서 잠시 옛 생각에 젖었다.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4명이 나와서 음악감상실 세시봉과 트윈 폴리오 시절을 얘기하며 그때 불렀던 노래들을 들려주었다. 20대 청년시절 젊은이의 우상이던 그들은 60대 이상 노인이 되어도 40년 우정을 나눠오며 허심탄회하게 지난날을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젊은 날 추억을 고스란히 끄집어내고 있었다.

미국에 온지 20년, 30년이 되어도 단번에 그 시절로 돌아가게 만드는 포크송과 CM 송까지, 그 시절을 살아온 우리 모두 함께 느끼는 감정들이 담겨져 있는 이런 노래를 만들고 부른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대학의 MT나 여름방학 수련회에 가서 무슨 노래를 불렀을 것인가?모닥불을 가운데 놓고 목청 터져라 부르던 “조개껍질 묶어 물가에 마주앉아...”, 손바닥을 엇갈려 치며 부르던 ‘라라라’부터 “말을 해도 좋을 까, 사랑하고 있다고...”로 시작되는 ‘맨처음 고백’,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사랑하는 마음’, ‘길가에 앉아서’ 등등 한창 공부도 연애도 다 놓치기 싫었던 우리들은 참으로 이 노래들을 많이 불렀다. 실연 후 부르던 노래도 있었다.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이나 “이제 밤도 깊어 고요한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외로이 남아있는 저 웨딩케익, 그 누가 두고 갔나 나는 아네, 서글픈 나의 사랑이여..” 등등.


그 외 ‘Don’t worry about me’, ‘Don’t forget to remember me’, ‘You’re the reason’ 같은 번안가요들, 이러한 노래들을 들으면 그때의 장소와 사연까지 저절로 추억이 떠오를 것이다.또 군사정권 시절 금지곡이 된 ‘아침이슬’, ‘고래사냥’, ‘왜 불러’ 등 노래에 숨은 사연은 그 시대를 관통해 온 우리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했다. 네 사람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혼을 하고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심지어 자신의 죽음까지도 마음을 모두 비운 채, 지난 삶을 풀어내고 있었다. 조영남은 “가수장을 가보니 고인이 생전에 불렀던 노래를 불러주더라. 내가 죽은 뒤 사람들은 ‘구경 한번 와보세요’ 하고 화개장터를 부를 게 아닌가, 그래서 내 장례식을 위해서 모란동
백이란 노래를 지었다”고 그 노래를 소개했다.

만일 넷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조영남이 제일 먼저 죽는다면 악동 후배들은 “또한번 모란이 피기까지 나를 잊지말아요”하는 근사한 노래 대신 조영남이 만들어 유일하게 히트한 노래 ‘화개장터’를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불러주지 않을까 싶다.다 늙어서 얼굴 라인이 무너지고 눈꼬리도 처지고 볼살도 처진 그들이 콘트라베이스와 기타를 치며 히트곡을 부르는 화면 위로 새파란 20대의 그들이 노래하는 장면이 애틋하게 흘러갔다. 2개의 CD를 다 본 뒤로도 매번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로 입담꾼 조영남을 한방에 무너뜨리는 윤형주가 기인 송창식에게 무덤덤하게 던진 한마디가 마음에 남아있다.송창식이 유별난 자신의 삶을 얘기하며 ‘염하는 날 철이 들까?’하는 말을 받아 윤형주가 툭 말을 던졌다. “철들지 마, 나 너 염하는 것 싫어, 나 죽기 전에 먼저 죽지마.” “너 죽으면 같은 날 죽으면 되지.” “그래, 그러면 되겠네.”가족애와 별도로 우정의 세계는 얼마나 폭넓고 큰 지! ‘인생에 한명쯤은’ 그런 친구가 있어
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삶에 그것은 축복이다.아마 당신도 주위에 그런 친구가 두엇은 있을 것이다. 지금 바로 전화 한번 걸어보자. 무심한 어조로 별 일 아닌 듯이 친구의 안부를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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