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 친구 Q

2010-09-2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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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는 한인 무기수다. 10년째 캘리포니아 프리즌에서 살고 있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받았으므로 살아서는 담장 너머로 나올 수 없다. Q는 엊그제 서른세 살이 되었다. 운동을 잘 하는 Q는 키가 훌쩍 크고 벌어진 어깨도 늠름하다. 그의 젊은 얼굴은 늘 쓸쓸한 표정이다. 두 눈은 무엇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 것도 보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3년 전, 처음 Q를 면회 갔을 때 그의 눈은 사물을 쏘아보듯 번들번들 빛이 났다. 엊그제 다시 면회를 가서 만났더니 웬 일인지 그 빛이 사라졌다. 잘 된 일인지 아닌지, 나는 알 수 없다.

Q는 나이가 어린, 나의 의동생이다. 지난 3년 간 그와 편지를 나누었다(큰사랑선교회: 김운년 목사). Q가 한글로 쓴 편지를 읽어보면 요즘 세상이 빠르게 주고받는 이 메일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서간문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최근 편지 중 한 구절을 소개하면 이렇다.

“쎌(감방)에 누워서 약간 위쪽으로 올려다보면 가느다랗게 긴 창이 있습니다. 그 창턱에 이름 모르는 노란 꽃이 피었습니다. 아마 바깥에서 무더기로 핀 꽃 중에 한 송이가 감방 안이 궁금해 들여다보려고 목을 늘인 것 같습니다. 그 꽃이 나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일부러 동작을 크게 합니다. 기지개를 켤 때도 일부러 크게 하고 팔굽혀 펴기를 할 때도 원 투 쓰리… 하고 크게 구령을 붙여줍니다. 일하러 나가는 시간에는 꽃에게 인사를 하고 갑니다. 나 지금 나간다! 거기서 기다려! 죽지 말고!”


또 다른 편지에서 그는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민을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싸구려 모텔방에서 하루하루 지내다가 그나마 돈이 떨어지자 아버지는 홈리스가 되어 떠돌아 다니셨고 나를 어머니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 당시 어머니는 새로 돈 많은 남자를 만나서 그 남자가 얻어준 아파트에 살았는데 내가 학교에서 일찍 집으로 오는 날에는 옷장 안에 들어가 있으라 하면서 네가 웬수다! 하고 울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미워하는 대신 내가 커서 돈을 많이 벌면 어머니에게 좋은 옷과 집을 사드려야지 하고 생각했었지요.”

Q가 3개월에 한번씩 밖에 받지 못하는 패키지(수감자가 필요한 물품을 외부 회사에 우편주문 해서 구매하는 시스템)에 주문하는 내용을 보면 내가 매일 대하는 식탁이 부끄러워진다. “오이 피클 1병, 커피 1봉지, 프림 1팩, 건포도 2봉지, 설탕 2팩, 칠리 1통, 면양말 3켤레, 면도기 2개…” 좋아하는 라면이 빠져 있기에 물으니 Q의 대답은 간단하다. “너무 비싸서요….” 라면 1봉지의 가격은 약 1.30달러다. Q는 한국 음식 중에 순두부 찌개를 그리워한다. 그의 말을 들은 다음부터 나는 순두부 찌개를 잘 먹지 않는다.

지난번 면회를 다녀온 뒤에 그가 다시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을 만나려고 먼 길을 와 주어서 고맙다는 내용과 함께 Q가 덧붙였다. “헤어지고 돌아오면서 후회를 했습니다. 좀 더 좋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제가 너무 쓸 데 없는 이야기만 한 것 같아요.”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정말 ‘쓸 데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 쓸 데 없는 이야기야말로 바로 서로가 곁에 있음을 확인하는 삶의 잔잔한 기쁨이 아니었을까.


김 범 수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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