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옌지 이야기”

2010-07-0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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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우리와 같은 모습, 우리가 하는 같은 말을 쓰던 조상들이 살았던 고구려 땅, 북간도로 유명한 연변에 갔던 여행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국을 등지고 이곳에서 독립의지를 불태우던곳, 빼앗긴 조국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이주자들의 땅인 이곳은 인천공항에서 겨우 두시간반이면 도착하는 곳이다. 북쪽땅을 빚겨가는 항로는 중국땅 대련을 바라볼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처음가보는 여행지는 막연한 기대감과 특히나 이곳은 불안감까지도 다가왔다.

작년 10월은 조류독감이 막 진정 기미를 보이는 때이기도 했지만 이곳 옌지(연길)공항은 온통 얼굴에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많았고 또 처음보는 군복과 제복을 입은 군인들, 붉은 깃발의 오성기들, 평소에 TV에서나 보는 장면들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긴장감을 늦출수 없었다. 조선족 자치주인 연변은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우대정책으로 한글간판이 우선적으로 보였고 그밑에 한자가 보였다. 정말 특이하고 반갑기도 한것이 올립픽가 한글 간판 같기도 해서 였나보다. 숙소로 향하는 옌지시내의 풍경은 70년대의 서울시내 모습을 생각나게 하기도 했다.

필자가 이곳을 방문케된 사연은 정말 연고가 없는 버려진 탈북자 자녀들과 조선족 3세 어린 아이들을 돕는 교포목사님이 운영하는 선교회의 일원으로 후원자로 이곳을 직접 오게 된 것이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곳, 연길, 옹정, 화룡, 도문, 안도, 훈춘 등에 퍼져 사는 조선족 동포가 아이들의 생활 환경도 정말 눈물 겨울 정도였다. 평방(핑황)이란 온돌한칸에 여러식구가 모여사는 모습은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기에 충격은 큰 것이었다. “일송정 푸른물에 말 달리던 선구자” 가곡의 바로 그곳 “용정”에서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생가도 있었다. 그때도 잊었을 먼 산 봉우리를 바라보며 시인의 정취를 느껴보기도 했다. 두만강이 시냇가같은 국경인 “도문” 바로 이곳 근처에서 미국 여기자 두명이 북으로 납치되기도 했던 곳이다. 지금도 밤이면 탈북자가 식량을 구하러 왔다 가기도 한다는 곳이다. 정말 영화같은 이야기가 실제로 이곳에서 보인다. 바로 10미터 앞이 두만강 줄기 시내물 국경이니 말이다. ‘도문’을 지나 ‘화룡’이란 조그만 마을에서 조선족 소학교를 방문했다. 조선족 3세 아이들이 억센 북한 사투리를 쓰며 다가왔다. 아주 오래부터 살아온 이들은 우리의 한민족임이 틀림없다.


특히 일곱살난 ‘김화’란 남자아이의 헝크러진 옷과 그러나 또렷한 우리와 닮은 모습과 얼굴, 초롱초롱한 눈, 이 아이를 꼭 껴안아 주며 자꾸 눈물이 나왔다. “인생 살이 사는게 뭔지, 왜 아이는 이런곳에서 묵묵히 살아야 하는지, 한다리를 잃은 아이의 여동생은 통통 튀는 걸음으로 학교엘 다녀야하는지” 혼란스럽고 괴로운 마음이 교차했다.

도종환시인의 시귀절이 생각났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훈춘’이란곳에서 멀지 않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이 있다기에 산아래부터 몰아치는 눈보다 몰아치는 가파른 산길을 헤치고 올라가길 30여분. 안개 걷힌 검푸르고 눈부신 “천지”가 내 앞에 저개 되었다. 정말 감격이었다. 우리 민족의 탄생을 알렸던 단군 할아버지의 고대 신화가 눈앞에서 보이는듯 했다. 민족의 영산답게 검고 검은 웅장한 백두산의 자태에서 무언가 들리는 듯 했다. “정복하라! 일어나라!” 알지못할 정기가 느껴졌다. 이런저런 처음보고 만나고 하는 일들이 집 떠난 여행길의 재미라지만 오랫만에 맛보는 신선한 충격, 충전된 삶, 이런것들이 아닌가 싶었다. 조선족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이 여행길은 매년 두번씩 있다. 바쁜 부동산중개일을 가끔 접어두고 한번쯤 참여해 보시라 권고하고 싶다.

(714)713-2494


마이클 방 / 비 부동산 동부 오피스 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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