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과거와 현재의 대화

2010-05-2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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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정
(컬럼비아대 티처스컬리지 사회과교육 박사과정)

나는 2009년 봄부터 뉴욕한국학교에서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지난 학기에는 중, 고등학교 학생들과 20세기 근대사와 일제강점기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영국의 여성 여행가이자 지리학자가 19세기 말 한국을 방문하고 쓴 기행기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1897)’을 통해 당시 외국인의 눈을 통해 본 조선의 근대화 과정을 소개하고, 한국영화 ‘모던보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한국과 일본의 관계 및 당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고민과 사회적 역할을 함께 토론하였다.
학생들에게 조금 더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본인들의 삶과 경험에 밀접하게 관련되는(culturally relevant) 역사교육을 할 수 있도록 나는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시는 허병렬 선생님께 부탁해 그분의 특강으로 1926년 생으로 그분이 몸소 겪으신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에 대한 생생한 경험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시작했다.

일제시대에 소학교에 다녔던 경험, 학생들 모두 이름을 강제로 일본어로 바꾸고 불러야 했기에 아직도 서로 친구들의 한국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이야기, 라디오에서 해방이라는 뉴스가 전달되자마자 대체 그동안 어디에서 숨겨놓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태극기가 거리에서 휘날리던 광경. 선생님께서는 당시의 경험을 떠올리시며 끊임없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나가셨다. 한국어를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는 2세 학생들과 고등반에 재학중인 외국인 학생들
에게는 내가 중간에 통역을 하며 시대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학생들은 선생님께 많은 질문을 하였다. 한 여학생이 당시 선생님의 일본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가슴 아픈 경험이기에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셨다. 그 학생은 책으로만 읽어왔던 이야기들은 직접 선생님께 전해 들으니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였을지 가슴으로 와 닿는다고 말했다. 다른 학생은 실제 일제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들을 접하고 몹시 흥미로웠다.

역사학자 E.H.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말했다. 당시 구술역사 수업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하고 있었다. 1926년에 태어나 80여년을 한국과 미국에서 살아온 선생님에게서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나와 학생들은 한 개인의 삶이 역사와 사회적 흐름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배웠으며, 책에 나오지 않는 개인의 삶과 경험을 통해 역사가 어떻게 다르게 전달될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14, 15세 정도의 이민 2세 학생들이 80대의 선생님과 질문과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역사를 공유하며, 20대 후반인 나는 이들 사이에서 언어와 시대를 보다 가깝게 연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를 사용하는 학교에 다니는 이민 2세 학생들에게 한국어와 역사를 심도있게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암기하는 역사와 강요하는 애국심이 아닌 이와 같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시도한다면 또한 학생들의 경험과 정체성을 고려한다면 보다 의미있는 역사교육을 지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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