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위기에 빠진 기러기 가족

2010-05-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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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지난 4일 뉴질랜드 클라이스트처치 지역의 기러기 엄마가 조기유학온 13,18세된 딸과 자살하자 9일 현지로 간 기러기 아빠까지 자살하는 일가족 참극이 빚어졌다. 이민과 조기유학지로 각광받아온 뉴질랜드에서 영주권 취득이 힘든데다 경제적 어려움 탓이라고 한다. 이곳 뉴욕과 뉴저지에도 기러기 엄마가 집단으로 사는 아파트가 있고 기러기 아빠나 일가친척집, 한인가정에 홈스테이 하는 조기유학생들이 많다보니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닐 것이다.불과 작년 10월에만 해도 뉴욕 롱아일랜드 지역 집단합숙소에서 한국 조기유학생 20명이상을
돌보던 한인남성이 인근 오이스터 베이 소재 가톨릭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폭행하여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그 결과 상당수 학생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전적이 있다.

한국의 조기유학 열풍은 2000년 새천년이 시작되자 나타난 사회적 현상으로 88년 해외여행 자율화 이후 일부 부유층의 도피유학이 중산층으로 확대되며 너도 나도 미국, 동남아, 중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 조기유학을 나왔다. 급기야 ‘기러기 아빠’ 신조어까지 등장시켰다. 당시 우리집에도 3개월 단기어학연수부터 1년까지 조카아이 5명이 교대로 머물다가 갔다. 대학 방학 중 혹은 1년 휴학을 하고 뉴욕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돌아가 대학을 마친 다음 한국 최고 기업에 취직하여 지금도 ‘이모, 고모, 고마워요’ 한다.친구의 친구 딸은 재수를 했는데도 모든 대학에 떨어져 그 집이 초상집이라는 말을 듣고는 일면식도 없는 그 아이가 딱해서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수없이 이메일을 하며(심지어 뉴욕에 바바리 코트를 가져갈까요 하고 물었다) 학교를 알아봐주고 공부할 전공을 찾아주었다. 결국 그 아이는 뉴욕 아델파이 대학 근처에서 홈스테이 하며 영어를 익혀 지금은 타주의 대학에서 공부 중이다. 본인이 하려고 하는 의지, 목적의식이 뚜렷하다면 미국 유학은 보내어도 된다. 어린학생이 변변한 보호자도 없이 공부하려 애쓰고, 알뜰하게 아이를 거두며 한인커뮤니티에도 동참하려 애쓰는 기러기 엄마라면 뉴욕 한인 누구나 도와주려 할 것이다. 김치를 담그면 갖다 주고 새로 만든 반찬 한가지라도 더 먹이려고 애쓸 것이다.


하지만 초호화 아파트에 모여 살며 아이가 학교 간 사이에 골프나 샤핑을 하고 교사들에게 명품 선물을 하여 물의를 빚는 기러기아줌마는 한인들의 냉냉한 시선을 계속 받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한인 경제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글쎄, 그들은 중국산이 많다며 아시안 수퍼에 안가고 미국 수퍼에 간다. 미국 백화점 가서 명품 사고 ‘메이드 인 한국’은 절대로 안산다.기러기 가족의 비애가 일어나는 이유는 아이가 자기 의지로 오지 않고 유학 열풍이라는 시류에
휩쓸리고 엄마의 허영에 등떠밀려 오기 때문이다. 전교석차 500명 중 250등 하니 한국에선 대학을 갈 수 없는 아이는 미국 일반사립학교도 안받아준다. 결국 재정난에 허덕이는 가톨릭 학교 같은 곳에 들어가나 공부를 못 따라가니 방과후 학원을 다니고 영어 수학 개인과외를 받는다. 폐쇄적으로 살면서 우울증을 앓고 엄마하고 대판 싸우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기러기 아빠는 교육비, 생활비를 뭉칫돈으로 보내며 명절이면 전자렌지에 햇반과 냉동음식을 데워 혼자 쓸쓸히 끼니를 해결한다. 그리고 오랜만에 가족이 만나도 소 닭 보듯 한다면 이미 위기에 빠진 기러기 가정인 것이다.

2006년을 정점으로 경기침체와 맞물려 조기유학이 주춤하다지만 한국의 조기유학박람회는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룬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매일 이메일을 하며 수시로 가족간 우애를 돈독하게 하고 아이도 적응을 잘 하여 학교생활이 즐겁다고 하면 조기 유학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뉴욕한인사회도 이런 기러기 가족은 얼마든지 품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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