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2010-05-06 (목)
크게 작게
박원영(경제팀 차장)

‘모방은 가장 큰 존경심의 표현’이라는 말이 있다. 영화감독들은 거장들의 작품 속 장면을 일부러 모방하며 ‘오마쥬’라고 헌사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유행하던 시기에는 타작가의 아이디어를 차용하는 것을 패스티쉬 혹은 혼성모방이란말로 치장하며 새로운 유형의 창의성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만의 컨셉을 생명으로 하는 아티스트가 아이디어를 도용당했다면, 특히 그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유명하고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만큼 억울한 일도 없을 것이다.

한인 설치작가 마종일씨가 최근 뉴욕 미술계에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스탄 형제(Doug & Mike Starn)의 메트뮤지엄 전시 ‘빅 밤부(Big Bambu)’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당사자들은 이를 강력히 부정했다. 가능성은 적지만 마씨의 주장이 객관적으로 입증될 경우, 즉 담당 큐레이터가 일부라도 이를 인정하거나 전시를 크게 보도했던 뉴욕타임스가 마씨의 주장을 비중있게 다뤄준다면 큰 반향을 일으킬 사안이다. 기자는 미술 평론가도 전문가도 아니므로 어떤 판단도 내릴 자격이 없다. 다만 ‘팩트’로만 말해야 하는 기자로서 몇 가지 객관적인 사실만 전한다면;마종일씨는 2001년부터 ‘빅 밤부와 아주 유사한’ 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스탄 형제는 주로 사진을 이용한 개념미술을 해왔고 2008년까지 이런류의 설치작을 발표한 적이 없다. 그들은 “실현시키지 않았을 뿐 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마씨는 스탄 형제의 스튜디오에서 2001년부터 2009년까지 함께 일했고 2009년 6월 해고당했다. 스탄 형제는 8년간 마씨의 작품을 지켜봤고 큰 관심을 보였었다. 뉴욕타임스가 전시 기사를 실었을 때 많은 동료 작가, 큐레이터, 평론가들은 마씨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공동 작업이냐?”고 물어왔다. 한 교수는 직접 메트 큐레이터와 뉴욕타임스에 이메일을 보내 “분명히 마종일에게 영감과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미술에서 표절이나 아이디어 도용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일반인의 눈에는 똑같은 작품도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이유로 ‘창작물’로 인정받기도 한다. “작가 생명을 걸고 싸우겠다”는 마씨가 원하는 것은 법정에서의 표절 판정이나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다. 자신의 명예, 그리고 뉴욕에서 계속 작업해 나갈 수 있는 자존심이다. 메트뮤지엄, 뉴욕타임스 등 스탄 형제를 한껏 띄어준 ‘힘 있는’ 기관들이 그에게 조그만 ‘크레딧’이라도 인정해준다면 너무나 큰 힘이 될 것이다. 동포들의 관심과 성원도 물론 필요하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