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그래도 지킬 것은 있지

2010-04-3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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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지난주에 오랜만에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한편을 보았다.
이 불경기에 웬 호사스런 뮤지컬이냐고? 나는 거의가 디스카운트 티켓을 산다. 사람이 살다보면 예기치 않은 일이 늘 발생하지 않는가. 아무리 좋은 좌석을 예매했어도 피치못할 일이 생기면 그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행운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내가 본 뮤지컬 ‘오키드’는 초록 마녀 엘파바와 금발미녀 글린다의 이야기이다. 쉬즈 학교에서 기숙사 룸메이트가 된 엘파바와 글린다는 처음엔 서로 싫어하다가 파티를 계기로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초록 피부와 마술 능력을 지닌 엘파바는 올곧은 성격에 마음도 착하나 어이없게도 사람들에게는 서쪽나라의 악한 마녀로 인식된다. 길다란 빗자루를 타고 검정 뾰족모자를 쓴채 하늘을 나는 마녀 엘파바, 양손을 부드럽게 돌려 주문을 외워 여동생을 휠체어에서 일어나 걷게 하는 것 등은 꿈, 환상, 마법의 세계 속에서 가
능한 일인지라 관객들은 쉴새없이 바뀌는 화려하고도 웅장한 무대 속에 흠뻑 빠진다.

복잡하고 힘든 현실을 잠시 잊고 다른 세계에 있다가 나오는 것, 이것이 무대에 대한 느낌이고 감흥일 것이다. 드디어 막이 내리고 출연진들이 나와 무대 인사를 했다. 객석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막 쏟아지는데 쉬즈학교 교장역인 중년여배우가 앞으로 불쑥 나오더니 박수소리를 잠재우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뉴욕시의 심각한 불경기로 인해 모든 문화예산과 후원이 50%이상 줄어들었다. 우리 모두 너무 힘들고 지치고 있다. 극장을 나가시다가 위키드 팜플렛, 포스터나 티셔츠, CD, 액세서리 등을 사 달라, 단돈 20달러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 입구에서 직접 돈을 도네이션 해도 고맙겠다.”다급하게 어찌나 힘주어 말하는 지 순간 정신이 멍해진 관객들. 무대 위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급하게 현실로 돌아온 관객들은 극장을 걸어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고 극장을 나서는 곳곳마다 양철 바케스를 든 배우들이 서있다. 양철 바케스에는 전부 1달러짜리인 지폐가 수북이 던져지고 있었다. 극장 밖으로 나오니 쌀쌀한 날씨에 내린 비를 그대로 맞아 옷이 푹 젖은 피에로 분장을 한 배우가 양철 바케스를 앞으로 쑥 내민다. 처음엔 동냥 바구니인줄 알았다. 이쯤에서는 그 배우보다 관객들이 더 창피한 지 다들 걸음을 빨리 하여 사라져갔다.당장 먹고 살 것도 없는데 문화생활을 어찌 할 수 있는가? 누구든지 경제에 타격이 오면 가장 먼저 줄이는 것이 문화나 여가비이다. 그러니 예술인들의 생활고는 막심할 것이다.그러나 관객은 관객대로 알뜰하게 돈을 모아 하루저녁 즐기러 왔을 것이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 실컷 무대 속 환상에 젖게 하고 그 꿈속의 무대에서 걸어 나와 관객에게 바로 이게 현실이다 하고 차갑게 일러주는 것은 좀 심하지 않은가?

‘자존심이 밥 먹여 주냐?’ 하는 말도 있지만 예술가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그것을 훈장처럼, 어떤 경우에도 당당하고 떳떳하기를 바라는, 그래야 작품이나 무대가 더욱 탄탄하여 보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는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지녀서인지도 모르겠다.하루빨리 경제가 좋아지고 브로드웨이가 활성화 되어 배우들이 양철 바케스를 들고 거리에 나서는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기 바란다. 마지막 보루까지 넘어지면 사람들은 어디에서 희망을 보고 꿈을 품을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힘들어도 지킬 것은 있지 않은가. 그래야 보는 사람도 자존심을 안 다친다.한인사회에는 주위의 도네이션을 받아야만 유지되는 단체나 모임이 많다. 하지만 최소한의 노력은 보여주어야 한다. 무조건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고 그 결과를 보여주면서 도네이션을 요청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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