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4.29폭동,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

2010-04-2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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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유권자센터 소장)

미국의 인종은 크게 백인과 유색인종으로 분류한다. 대륙을 처음 발견한 영국계 이민자인 앵글로색슨(WASP)족과 유럽계 이민자들을 합해 범백인계는 전체인구의 약75%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는 소수 유색인종이라 하는데, 흑인, 남미계, 그리고 아시안계로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한다. 유색인종은 남미계가 12%, 흑인이 10% 그리고 아시안계가 나머지 약 3%이다. 그 아시안계 중에서 인도계가 가장 많고, 중국, 베트남, 필리핀,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의 순서이다. 미국의 여론주도층들은 미국사회를 백인계와 유색인종으로 분류하고 유색인종계는 남미계, 흑인, 그리고 아시안계 라고 하고 있다. 행정부나 정치권에서 아시안계를 더 세세하게 분석하고 구분해서 베네핏을 만들지는 않는다. 주정부, 연방정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시안계를 위한 모든 베네핏은 중국이나 인도계 차지일 수밖에 없다.

‘소수계 연대’ 혹은 ‘이민자연대’라고 슬로건을 내 걸고 있지만 어떤 경우엔 남미계를 위해서, 혹은 중국인들을 위해서 한국계 활동가들이 선도에서 희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연대”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상의 주체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서로 협력하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의 힘이 없는 연대는 일방적으로 소모전이고 일방적으로 혜택만 보게 된다. 진정한 연대가 아니다. 우리가 남미계를 도왔다면 남미계로 부터 최소한 감사의 인사라도 와야 하고, 흑인계와 연대를 했고 흑인계를 도왔다면 반드시 그들로부터도 어떠한 도움의 표시가 있어야 그것이 서로간의 연대를 입증하는 것이다. 서로 간에 협력의 파트너로 인정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힘이 없으면 연대의 대상이 아니고 파트너로 될수가 없다. 이것을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고립을 자초하는 일이다.


미국은 총체적인 사회적 작동방식이 아주 냉혹한 힘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이것을 용인하지 않으면 미국사회를 떠나야 할 정도이다. 그 중에서 어느 한 단위집단의 힘을 나타내 주는 것은 정치적인 영향력이다. 한 집단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법적으로 허용된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는 방패막이다. 다시 말해서 한 단위집단의 보호는 실정법으로가 아니고 그 집단이 결집해 낸 정치력으로 보호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길지 않은 미국의 근. 현대사가 이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흑인이나 남미계 커뮤니티가 우리의 눈에는 아주 낮은 생활수준의 천박한 일상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들을 한 인종의 집단으로 보면 우리 한인커뮤니티를 훨씬 능가하는 그들 공동체의 힘이 보인다.

그들은 개별적인 이익만큼 공동의 이익을 중요하게 여기는 높은 수준의 시민 정신을 갖고 있다. 흑인들에겐 노예의 굴레를 스스로의 자각과 투쟁으로 벗어났다는 역사의식이 그들의 자존심으로 살아있고, 남미계에는 개인의 일과 종족의 일을 같은 가치로 여기는 특별한 강점이 보인다. 한 집단의 정치력을 결집해 나가는 일에 골몰하고 있는 필자에겐 늘 부럽게 보여 지는 대목이다.
만 17년 전의 오늘, LA에서 폭동이 났다. 순식간에 한인들의 생존기반이 무너져 내렸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다. 납세자의 참혹한 피해에 정부가 침묵하며 어떠한 배상이나 보상도 없다. 현대적인 국가개념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당시 4.29폭동의 가장 큰 교훈은 다인종사회에서의 고립이다. 4.29폭동은 한인사회가 ‘미국속의 한인’이 아니고 ‘한국계 미국인’으로의 전환을 요구했다. 뉴욕이나 로스엔젤레스가 대한민국 뉴욕시나 나성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교훈을 남겼다. 1세 중심의 한인사회가 지나치게 모국지향적인 것의 문제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만17년이 지났는데 과연 그때의 그 교훈
에 한인사회가 얼마나 진지하게 대답을 했는지... 폭동 17주년을 맞이해서 한인사회 지도자 누군가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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