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삼식의 이야기

2010-04-2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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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길 (수필가)

하루 3끼 다 찾아 먹으며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는 명퇴당한 남편들을 ‘삼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이들이 마누라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게 초라해 보이기도 하며, 구차스럽고 한편으론 민망스러워 진다는 것이다. 한 때는 ‘당신 없으면 못 산다고...’ 싹싹하던 아내 주위에 어느 날부터 찬 기운이 돌게 된다.

나도 이제 삼식이가 되고 보니 손자들 키우는 일(after service)이 그나마 늦으막에 나에겐 삶의 보람이 되고 있다. 동네 놀이터에서 흙 범벅을 하고 울며 집에 온 애를 보는 부모의 마음은 분통이 터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 딴엔 손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라고 시범을 보이기도 하며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될 수 있으니 이러면 되고 저러면 안된다고 신신 당부하기도 한다. 학기마다 한번씩 학부모를 불러서 선생님은 유아원 아이들에 대한 교육과 일반 생활상태를 보여 주는데, 우리 손자 녀석이 공부도 잘하고, 어린아이 같지 않게 아주 으젓하다며 지난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한번은 Serena라는 여자애가 우리 손자의 옆구리를 아무 이유도 없이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몇번을 그러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계속해서 괴롭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두지 못해!(Stop it!)” 하며 꽥 소리를 질렀단다. 이 소리에 아이들을 지켜보던 선생님이 손자녀석과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고 한다.
“ 왜 소리질러, 앤디?” “Serena 가 나를 쳤어요. 그래서 그만두지 못하냐고 여러 번 말했는데, 계속 그러니까.....” “Serena!, 왜 그랬어?” “나, 안그랬어요!” 그러면서 울어버렸다. 상대에게 맞았다고 울며 호소하는 것이 애들의 습성인데 우리 손자 녀석은 울지도 않고, 정당한 자기 행위에 대하여 아주 으젓하고, 당당하게, 선생님 들으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남자애 같았으면 한방 날렸을 텐데, 여자 애라서 봐 주었다고 우쭐대는 바람에 집안 식구들의 배꼽을 잡게 한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전술. 전략을 잘 써 먹었구나 싶어 입가의 미소는 떠날 줄을 몰랐다.

지난 일요일엔 Serena의 생일파티에 초대를 받고도, 버릇을 좀 고쳐 놓아야 한다며 어른스레 손자 녀석은 거절했다. 애들이 괜스레 찝쩍거리며 왕따를 시키려는 행동을 보면, 마음 조아릴 때가 많다. 우리 삶이 모두 그런 것 같다. 나라 일만 해도 우리가 약해 보이면 상대방은 늘 찝쩍거리게 마련인가. 한국은 좌측 옆구리- 백령도에서 된통 당했다. 군함이 폭파됐는데 까마귀 떼를 탓하고 있다니... “너, 그만 두지 못해!” 이 한마디도 못하나… 난세에 영웅은 어딜가고. 강력한 대통령도 보이지 않고, 면피성 꼭두각시들의 망발만 만발할 뿐이다. 나라를 살펴야 할 ‘삼식’이는 간데없고, 밉다면서 미국만 올려봐야 하는 국민의 속은 얼마나 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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