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 무덤에 누워 있는 두 형제

2010-04-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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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 (시인)

시골길을 가다보면 자주 보이는 것이 공동묘지이고 공동묘지에 서있는 묘비들이다. 나는 공동묘지에 들러 묘비에 적인 이름과 그들이 이승에서 얼마를 살다가 갔는가가 궁금하여 별별 상상을 다 하며 꼼꼼히 거닐다가 그 곳을 떠나곤 한다. 그런데 커네티컷 소도시 공동묘지에 드물게도 형제가 한 무덤 속에 누어있다. 무슨 사연으로 그렇게 되었을까?

큰형의 이름은 버나드로 그가 세상을 뜰 때의 나이가 30살이었고 그의 동생 이름은 죠셉으로 29세 나이로 세상을 떴다. 1917년 4월 30일에 동생이 갔고 같은 해 7월 17일에 형이 뒤 따라 갔다. 동생은 앉아서 살아야만 하는 불구의 몸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고향인 이스라엘을 떠난 그의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오게 된 그의 가족은 한인 이민 1세처럼 먹고사는 일을 먼저 해결해야만 하는 이민생활 때문에 아침 일찍 집을 나간 부모는 해가 지고도 한참 있어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부모는 언제나 피곤했다.


형은 동생의 불구 원인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전적으로 자기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무엇인가 잘못을 저질러 놓고 태어난 자기의 잘못이라고 늘 생각을 하고 그 죄 값으로 동생을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내고 동생은 결국 형의 손을 잡은 체 세상을 떠났고 형은 동생이 떠난 후 석 달 동안 동생의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형도 곧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루기 전, 모진 슬픔을 안고 어머니가 형의 유품을 이것저것 만지고 있을 때 낙서 한 장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내가 가야 한다. 동생은 하늘가는 그 길도 업어 줄 사람이 없어 가까운 어디엔가 앉아 있을 것이다.

내가 가서 업고 가야 한다. 나를 데려가 주소서!” “내가 죽으면 동생이 누어있는 곳에 누가 나를 함께 누이겠는가? 동생을 생각하면 가슴만 답답하구나!” 유서가 아닌 낙서였지만 그의 부모는 동생이 누어있는 곳에 형을 같이 뉘였다. 그리고 비석에 “Two Brother 죠셉과 버나드”라고 써서 세워 주었다. 영어로 형제를 Brother라고 한다. 이 Brother란 앞의 두 글자인 Branch의 약자 Br을 빼면 Other, 즉 ‘남이다‘ 라는 뜻이 된다. 구약에 기록이 되어 있듯이 가인과 아벨은 서로 세상에 먼저 나와 형이 되겠다고 씨름을 하다가 먼저 나가는 형의 발을 잡고 당기다가 동생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가인과 아벨은 시기와 질투로 싸우다가 가인은 아벨을 아무도 모르게 죽인다. 일찍부터 가르쳐 준 형제간의 불화. 그러나 미국에서는 나이 많은 노인 둘이 한 차를 타고 며칠 몇 달을 같이 여행하는 사람을 자주 본다.

형제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가까운 친구는 형제자매다. 더욱이 나이가 들면 젊어서 가까이 있던 친구들도 많이 떠난다.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몸이 바라던 즉흥적 흥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 엇비슷하게 겪어온 삶의 질곡을 이해하고 대화하고 쓰다듬어주는 사람이 형제자매다.
미국사람들은 이를 인생의 따뜻한 값진 선물로 알고 나이 들어 형제나 남매가 같이 여행을 하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그간에 하지 못했던 상대의 손발 되기를 자청하면서 삶의 가치를 발견한다. 먼 길을 먼저 간 동생 죠셉의 무거운 행장을 걱정하다가 동생을 뒤따라 간 버나드, 한 무덤에 같이 누운 두 형제는 지금도 다정히 손을 잡고 먼 길을 한없이 갈 것이다. 우리는 지금 형제, 자매에게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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