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네거리를 건너다

2010-04-12 (월)
크게 작게
허병렬 (교육가)

곁을 지나가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린다. “이 곳은 자유의 나라가 아닌가. 그런데...” 그 자유에 제한이 있어서 불만인 듯하다. ‘자유’는 만인이 갈망하는 보물이다. 남에게 얽매이거나 구속받거나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자기 자신을 무한대로 펼 수 있다면 얼마나 신나는가. 만약 자유가 제한적이라면 이미 자유가 아니지 않는가. 글쎄?

많은 사람들이 네거리에 모였다. 그들은 제각기 길을 건너가려고 한다. 사람들은 서로 밀치고 부닥치면서도 길을 건너가려고 하다가 드디어 화를 낸다. 힘이 센 사람들, 다른 사람은 아랑곳없이 자기 길을 고집하는 사람들만이 겨우 길을 건너간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각자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서로 다르고, 한꺼번에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런 혼잡을 해결하는 것이 교통신호다. 이 방법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까.철두철미 자유일 수 있을까. 있다. 혼자 사는 곳에 가면 가능하다. 아무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생활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 속에서 생활하면서 삶의 뜻, 즐거움을 느낀다. 그래서 자유의 범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자유의 진가를 알리고, 자유를 만끽하도록 도와주는 학교조차 여러 가지 규칙이 있다. 학생들은 대체로 규칙을 지키려는 노력을 보이지만, 가끔 잊거나, 고의로 깨뜨리려는 장난 끼를 보인다. 그런데 좋은 방법이 있다. 학교에서 지키게 하고 싶은 규칙을 학생들이 스스로 정하도록 한다. 시간 중에 교실을 드나드는 일을 한 번 이상 하지 않게 하려면, 그 때마다 학습 분위기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서로 이야기하고 나서 학생들이 출입 회수를 정한다. 숙제하기, 토론하는 방법, 학교 비품 사용, 과외 활동, 그룹 활동, 친구 사귀기...등에 관한 규칙도 위와 같은 방법으로 정하면 효과가 있다.

일반 사회 생활에 영향을 주는 조례 즉, 세부 규칙, 법령의 범위 안에서 제정하는 규정 등도 대체로 이런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면 국가나 공공단체가 공청회를 열어 일반국민과 이해 당사자나 전문가에게 공개 석상에서 의견을 듣고 그것을 참고로 하는 제도이다. 이런 노력들은 되도록 많은 사람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따라 생기는 불편함이나 제한은 각자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학교에 일과표가 없이 각자 공부하고 싶을 때 개별지도를 하면 성과를 올릴 수 있겠지만, 학교는 집단 교육 장소이다. 교통신호등이 없이 제각기 길을 건너면 좋겠지만, 사람과 차량이 많은 도시에서는 혼란 상태를 이룰 수 밖에 없다. 결코 나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약속. 규칙. 규정. 규범이 생긴다. 요즈음 어느 곳에서는 횡단도로에서 교통신호를 지키지 않으면 벌금을 지불케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행정처에 돈이 필요한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교통사고를 막으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다. 차가 오지 않는데 교통신호를 지키는 것이 바보스러운 일일까. 판매원이 없는데 상자에 돈을 넣고 신문을 가져가는 일이 어리석은 일일까? 하나씩 자유로 가져가라는 벽보 앞에 놓인 물건을 서너 개 가져가면 영리한가. 저 앞에 친구가 있어도 긴 줄 끝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다니, 아까 같이 서 있다가 잠깐 자리를 떴다면 안 될까. 편히 살 수 있는 방법, 요령 좋게 일하는 방법이 눈앞에 수두룩하다.

그러나 어리석게, 바보스럽게 살면 어떨까. 그렇게 살아서 큰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만 나빠지며, 공동생활을 깨뜨리는 요인만 만들게 된다. 어리석게, 바보스럽게 산다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려면 모두 제대로 살 수 밖에 없다. 이 방법만이 자유의 범위를 넓히는 길이다. 지금 네거리에서 교통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자유를
지키며, 자유를 노래하는 사람들이다. ‘가라’는 신호가 나오면 그들은 횡단도로를 활보할 것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