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문의 날과 서재필

2010-04-0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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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황석(서재필 친우회 사무총장/약사)

오늘은 신문의 날이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한국최초의 신문 ‘독립신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날만 되면 나는 내가 송재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 만드는데 참여했던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1950년대 중학교시절 우리 반에서 학급신문을 만들었다. 신문반이었던 나는 발행인도 되고 주필도 되고 가리방을 긁어 등사판에 미는 인쇄인 노릇도 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서재필의 독립신문 시작이 아마 이와 비슷했던 모양이다. 미국에서 의사가 된 서재필은 미국의 힘이 민주주의와 뉴욕타임즈에 있다는 걸 깨닫고 10년 만에 귀국한다. 자유,평등,독립이 무엇인지 알게된 송재는 정부협조로 독립신문을 만든다. 그런데 당시 신문이라는 게 50년대 중학교 학급신문 비슷했다. 남녀 상하 귀천없이 보게하려고 언문으로 시작하였다. 하긴 미국최초의 한인신문인 뉴욕 한국일보도 시작할 때는 타불로이드 판처럼 초라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일보는 최고로 성장하여 200만 미주한인사회의 눈과 귀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독립신문이 그랬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반응은 엄청났다. 처음에는 격일로 나오다가 매일 발행하여 최초의 유가지로 돈을 받고 팔았다. 한번 읽고 버리는 게 아니라 돌려가며 읽었는데 신문한장을 평균 200명이 돌려 읽었다. 영문판도 만들어 조선을 바르게 알리기에 힘썼다. 서재필이 시작하여 나중에는 주시경,아펜젤라 선교사, 윤치호 등이 같이 담당하였다. 미국, 영국, 일본 공사관은 독립신문 영문판 기사를 읽고 본국에 한국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러시아의 압력에 의해 3년 만에 문을 닫는다.

한국인은 매스컴 민족이다. 나라에 무슨 일이 터지면 벽보를 붙여 백성들에게 알렸다. 이를 방(傍)이라 했다. 문장가들이 격문을 부치면 의기남아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조국을 위해 몸을 던졌다. 당나라 희종시절 영웅 황소가 난을 일으켜 전국이 위태롭게 됐다. 희종의 칙서에도 당종 팔대가들의 현하문장으로도 꿈쩍 않던 민심이 신라유학생 최치원이 황소격문을 발표하자 전국의 제후들이 들고 일어나 황소를 사로잡아 버렸다. 라디오가 나오기 전에 한국인들은 이미 공중파 방송을 시작하고 있었다. 대나무밭에 들어가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하고 방송을 해대면 발 없는 말이 풍문을 타고 천리를 달려 만백성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TV드라마 대장금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정복한 것도 따지고 보면 서재필이 시작한 신문덕분이다. 독립신문과 교육을 통한 국민계몽의 선각자,이민자로 87세에 미국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일관되게 통일 개명조국을 희구하였던 DR.Philip JAISOHN 서재필 선생을 생각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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