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부활

2010-04-0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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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 객원논설위원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한 번은 반드시 죽게 돼 있다. 보편적 진리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도 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 그 자체는 세상의 그 어떤 것 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 된다.
인류 역사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태어났고 또 지금 이 시간에도 태어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지금 이 시간에도 죽어가고 있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하루에 태어나는 인구는 21만여 명이고 하루에 죽는 인구는 14만7천여 명이라 한다. 한 달이면 태어나는 인구는 약 630여만 명이요 죽는 인구는 440만 여명이다. 태어날 때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수동적으로 태어난다. 태어나는 것 자체는 수 억분의 일이라는 아주 작은 확률에 의해 태어난다. 한 사람의 태어남은 한 인간이 태어남이요, 한 인간의 태어남은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태어날 때는 부모에 의해 빈손과 맨몸으로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그렇지 않다. 죽을 때는 자신의 업적과 이름을 가지고 죽는다. 어떤 사람은 명예롭게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 이름에 존경을 받으며 죽는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에이, 그 사람 아주 잘 죽었다”란 나쁜 평을 들으며 죽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어야 할까. 요즘 한국에서는 ‘천안함’ 침몰로 온 나라가 벌집을 쑤셔 놓은 듯하다. 연일 방송과 신문은 천암함 뉴스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끝내는 것 같다. 104명 중 58명의 해군들은 구사일생으로 구조돼 살아났다. 하지만 실종되어 가족들에게 피눈물을 뿌리며 애타게 하는 46명의 소식은 뉴스를 보는 사람들에게 비통과 안타까움을 안겨 주고 있다.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하여 대통령부터 온 국민이 기원하는 가운데 날짜는 속수무책으로 지나가 이미 생명 연장의 한계시간을 훌쩍 넘어 버리고 말았다 한다. 이토록, 침몰원인과 실종된 병사들의 생사여부로 온 국민이 애타하고 있는 가운데 구조작업을 벌이던 군인 한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53세의 한주호 준위다. 1975년 해군에 입대해 35년간 나라와 군을 위하며 살다 장렬히 갔다.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하여 구조대에서 제일 앞장섰던 그는 살신성인의 정신을 우리들에게 뜻있게 보여 주었다. 가족들의 슬픔이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겠지만 그가 남긴 정신과 행동은 두고두고 대한민국 해군 역사에 길이길이 남게 될 것이다.

하루만 있으면 부활절이다. 부활절은 미국에서는 가장 큰 절기중의 한 날이다. 미국에서는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추수감사절이 큰 절기에 속한다. 부활절은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리는 날이다. 부활 의미에서의 가장 깊은 뜻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데 있다.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 그리스도가 갖는 의미는 다양하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어난 예수가 이 세상 모든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속죄제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끊겨졌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켰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의 또 다른 의미는 사람이 죽어도 다시 태어나 영생한다는 부활사상에 있다.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과학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나 신앙을 전제로 하는 교리 안에서는 가능하다.

신앙은 믿음이요 믿음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사람은 죽지 않고 역사 속에서 살아남는다. 이순신장군, 안중근의사 등등. 또 이번 천
안함 침몰 구조 중 살신성인의 삶을 보여준 한주호 준위 같은 경우가 그렇다.
사람은 죽는다. 보편적 진리다. 그러나 죽음을 이긴다는 부활의 신앙도 있다. 기독교의 경우 부활의 의미에서는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몸도 살아난다. 기적의 변화다. 계란이 병아리가 되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변화가 곧 부활의 의미다. 일상에서의 부활도 있다. 일상에서의 부활은 곧 삶이 변화되는 것이다. 우주하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주인공인 사람인 내가 변화될 때, 그 곳에 부활이 있을 수 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교리적 신앙 안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 안에서도 사람은 영원히 살아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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