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들리는 ‘그대로’ 듣노라니-

2010-04-05 (월)
크게 작게
잔뜩 찌푸린 하늘을 이고 새벽 갓밝이에 길을 나섰다.

워낙 익어 있어, 간만에 오르는 길인데도 눈에 설지가 않았다. 산자락에 고즈넉이 자리한 마을과 그 너머 속절없이 누워 있는 모하비 사막 위로 몽환인 듯, 운무가 자욱하다.

선원의 앞섶에 서있는 몇 그루 과일나무 가지들 위에는 벌써, 봄물이 조심스럽게 오르고 있었다. 여우도 눈물 흘린다는 꽃바람의 싸한 냉기로 코끝이 아리다. 그 탓인지 나뭇가지들 사이로 앙증맞은 산새들이 재잘거리며, 제 소리를 물고 이리저리 부산을 떨면서 몸을 데운다. 언덕바지에 붙어 좁쌀 만한 노란 꽃망울을, 멋모르고 성급하게 머금은 들풀들도 안쓰럽게 떨고 있다.

어째 밝을 녘부터 날 낌새가 수상타 했더니, 뒷산머리께 어슬렁거리던 비구름이 기어이 내려앉으며 추적거리기 시작했다. 때 아닌 사막의 봄비는 한나절을 지나서도 고만한 정도로 가만 가만히 젖어들어, 산과 들이 더 없이 촉촉하다.


아마도 이 비가 지나고 나면, 뜻밖에 일용할 양식을 얻은 뭇 생명들은 한 해를 건널 채비로 더욱 바빠지고, 결실을 향한 열정은 점점 여물어 갈 터이다.
그래서 따사한 봄볕 아래 흐드러진 산야는, 한결 여유로워진 바람과 새와 들꽃들의 ‘맑고 향기로운’ 담론으로 가득할 것이다. 계절의 갈피 속에서 그들에게 지난 겨울은 결코, 상실과 소멸의 시간이 아니다. 유장한 시간의 흐름 가운데 준열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한 쉼 없는 쉼표였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생명이 될 대로 다 되어,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은밀한 몸살이었다. 아는가. 그것은 어느덧 우주의 나이만큼이나 되풀이 앓아온 몸살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들이 함께 할 경이롭고 아름다운 행사, 말을 빌리자면 ‘지상 최대의 쇼’를 위해, 뭇 생명들의 치열한 ‘생명에의 의지’가 갈무리된 내밀한 은둔이었다.

그래서 누구는 ‘아! 봄이 하는 일은 모두가 아름답다’고 했는지 모른다.
우주는 전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다. 우주는 그물의 벼리를 당기면 그물망 전체가 따라오듯, ‘세계선’(world line)이라는 인과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동시에 ‘되먹임’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적 단일체이다.

그러기에 한 송이 꽃이 피는 몸 ‘짓’으로도 우주는 진동한다. 그 대자연의 아름다운 몸짓은 ‘있는 그대로’ 조작 없는 진리이다. 그 몸짓은 바로 ‘그대로’가 글자 없는 경전이다. 대자연은 쉬지 않고 아낌없이 경을 읽어 주고 있다. 우리는 대자연이 읽어주는 경을, 침묵의 몸짓을, 그 ‘우레와 같은 침묵의 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되기 위해서는 왜곡되고 굴절된 시선으로 경을 보아서는 아니 된다. 나와 경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편견과 차별, 고정관념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해방되어, ‘날 것 그대로’를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보고 듣는 감관의 자극을 알되 그것에 걸려 놀아나지만 않는다면, 그것들의 노예가 되지만 않는다면 이미, 자유다.

의심할 바 없다. 저절로 비가 되고 소리가 되는 것을. “들리는 ‘그대로’ 무심코 듣노라니/ 나 자신이었다/ 처마 밑 낙숫물 지는 소리.”


박재욱 /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