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복음 이야기 - 종교, 지옥을 경고하다

2010-03-2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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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한 비닐봉지에 파닥거리는 작은 물고기들을 가득 싸 담고 한강으로 가는 할머니를 우연히 만났다. 불교신자인지 자신이 지은 죄를 부처님께 용서받으려고 강물에다 물고기를 방생하러 간다고 했다. 하나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전하지 않아도 죄의 심각성은 절감하는 듯했다.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 석가의 뜻과 달리 그를 하나님과 대등한 ‘부처님’으로 신격화시킨 대중적인 특정 불교 종파의 영향이 짙게 배긴 했지만, 그 할머니의 말이 무척 인상 깊었다. “사람이 세상에서 짓는 티끌만큼 작은 죄도 부처님한테는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른다.”

언젠가 불교에서 묘사하는 지옥의 광경을 읽은 적이 있다. 붉게 달궈진 쇠철판 위에 발가벗은 사람이 맨발로 서 있다. 뜨거워 한 발을 떼면 다른 한 발을 내디뎌야 하고, 발바닥을 번갈아가며 떼야만 하는 딱한 상황이 반복된다. 이런 고통을 수억조년 이상 당해야 죗값이 갚아진다고 쓰여 있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인간의 죄악에 반드시 보응이 따른다는 깨달음만은 분명했나 보다. 그래서 상상으로나마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런 형벌의 장소인가를 밝혀 도덕적인 교화수단으로 삼으려 한 듯싶다. 불교는 주로 장소보다는 상태의 개념으로 천국(열반)과 지옥을 그리지만, 모든 생물이 윤회하는 육도(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지옥이 자리한다고 가르쳐 왔다.


고대로부터 죽은 뒤 악인을 선인과 쫙 갈라놓는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상은 이슬람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세계 종교들에서 발견된다. 힌두교에서는 영혼들이 21곳의 지옥을 거치며 환생 과정을 겪는다고 말한다. 이 가르침은 힌두교의 한 분파로 시작된 불교의 지옥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원시시대부터 여러 민족들의 신화에도 ‘어둡고 뜨거운 지하세계’ ‘외딴 섬’에 빗댄 지옥이 등장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지옥은 죽음의 신 헤이데스가 사는 곳인데, 호머는 ‘일리아드’에서 그 곳을 ‘소름끼치는 공포에 떠는 끔찍스러운 썩은 방’이라고 묘사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거나 인정치 않아도 지옥이 있다는 건 어렴풋이나마 느끼며 산다. 양심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일상에서 지옥을 떠올리기는 애써 꺼린다. 가끔 할리웃 영화에서 “지옥에나 갈 녀석!” 같은 대사가 나와도 무덤덤하다. 애매하게 희화화된 종교적 용어나 욕설의 하나로 전락한 지옥만큼 우습고 가벼운 것도 없다. 그러나 무언가 켕기는 불안은 쉬 떨쳐지지 않는다. 당신은 어떤가.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지 않는다. 지옥이라는 실체가 없다면 인간의 양심 한 켠에 은근히 스민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없을 것이다. 피조물인 사람들이 만든 종교에 등장하는 지옥이 제 각각 모양의 그림자라면, 창조주 하나님을 저자로 둔 성경 기독교의 지옥 경고는 단 하나의 실체 그대로다.

타종교의 지옥관은 역사적이기보다 교훈적이다. 그러나 인류사 초기 첫 사람 아담의 타락을 ‘지옥행’의 빌미로 지목해 온 책, 유일하게도 그 지옥 권세를 깨트린 한 실존인물을 주된 테마로 삼는 성경은 지옥마저도 엄연한 역사로 소개한다. 만약 당신이 죽은 직후까지의 여생을 비디오로 미리 찍어둔다면, 그 마지막 컷은 당신이 지하감옥에 철커덕 수감되는 장면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5).

안환균 / 사랑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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