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문기 뉴스타 부동산 대표
여론재판은 무서운 면이 있다. 군중들은 사실보다도 가십거리에 더 관심이 있다. 재미삼아, 혹은 자신의 구실거리로 남을 소재로 쓴다. 사연을 들으면 형, 동생하며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익명성이 보장되면 철천지원수 대하듯 하는 폐해가 분명히 있다.
지난번 한국 국회 내의 어떤 예술인들의 행사장에서 축사의 말을 할 기회가 있었다. 몇 명의 국회의원들이 참석을 했고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한 자리였다. “이젠 유승준이를 편하게 해 주자”고 “이젠 그의 일이니까 내버려 두자”라고 했다. 만약에 유승준이 아주 위대한 과학자였더라도 한국 정부의 여론의 발 빠른 대응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연예인 나부랭이가 까불고 있다는 딴따라 무시풍조도 분명히 한몫했다. 영원히 고립시킴으로서 익명성이 주는 달콤한 유혹을 즐기고 있지는 않는가? 많은 젊은이들이 연예인을 동경하면서도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의 시각은, 정말로 배타적이고 이중적이라는 생각이다.
유승준과 관련해서 우리가 반성해야할 또 한 가지는 한국에서 자라나는 국수주의적 행태이다.
반미주의는 분명히 실존한다. 이는 단지 한국만의 유일한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반미감정의 출발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미국을 통해 개인적 영달을 챙겨왔던 많은 위정자들 혹은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로 인해 왜곡된 측면이 많다. 친미를 주장해 개인적 욕심을 채워왔던 자들에 대한 반감이 유승준을 통해 표출된 면도 있다고 본다. 지금은 소위 말하는 좌파정권에서 우파정권으로 바뀌었다. 이젠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한다. 250만 미주 한인들이 본국에 대한 공헌도를 생각해서라도 생각을 해 주어야 한다. 이제 유승준을 내세워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었다. 항간에 떠도는 말처럼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한 사람이 철저히 외면을 당했고 당하고 있다면, 왜 그럴까 질문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당시 한국민의 공분을 일으킨 모든 행태를 용서할 순 없다하더라도, 선진국 시민이라고 자처한다면, 적어도 갱생(?)의 기회를 한 번은 주는 도량정도는 필요하다. 그리고, 유승준은 자신을 통해 오히려 우리자신을 거울 앞에 세우게 하고 있다. 익명성이라는 가면으로 한 개인의 사생활을 재단하고 짜깁기 하려한 측면은 없는지 반성해보자.
성숙한 시민의식은 케이스를 통한 철저한 자기반성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 언론은 떠들고 싶어한다. 하지만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 것도 또한 언론의 몫이다. 몇 해 전 내가 로스엔젤레스 한인회장 때 미국국민들의 경악을 금치 못했던 사건 하나가 있다. 수십 명의 학생들을 무작위 총기난사로 죽인 버지니아텍의 학생이었던 한국의 한 젊은이 조승희이다. 미국인들은 불과 며칠도 안 되어서 사건 진상발표를 지켜보았다. 사안이 중대한 탓도 있었지만, 불필요한 여론의 차단에 대한 불문율의 에티켓이 정부와 시민사회에 퍼져 있었다. 미국에 있는 한국인으로서 감탄이 나는, 그러한 모습이 부러웠다. 사실과 가치판단을 엄격히 구분하려는 시민사회의 노력이 돋보인 사례였다. 그리고 이어서 터져나오는 자성의 목소리는 다음과 같았다. “조승희는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누구도 조승희를 욕할 자격이 없다” 미국교육의 일그러진 단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젠 우리가 매듭을 풀어야 한다. 글로벌 시대이다. 매듭 푸는 것도 배워야 한다. 얼마나 위대한 용서인가? 이 처럼 모두가 용서하고 사랑해 주어야 하는 날이 조만간 오기를 기대한다. 나는 그날을 위해 여러 곳에 고군분투할 것이며 과거의 아픔보다는 미래를 중시해야 발전과 용서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