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비운의 한일합방 100돌

2010-03-0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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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 (의사)

올해는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이 체결된 지 100년째 되는 해다. 우리 부부가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의 아들의 의과대학 기숙사에 들렸을 때 일이다. 우리를 맞는 아이가 뒷머리를 길게 길러 머리 꼬랑지를 고무줄로 묶고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청나라를 무대로 한 무협영화 액션 주인공의 헤어스타일이다. 아들을 보는 순간 두 주먹을 불끈 쥔 남편과 아버지를 쏘아보는 아들은 마치 격돌을 앞둔 투우사들 같았다.하지만 아버지라도 아들의 머리 꼬랑지를 가위로 자를 수는 없었다. 아들은 나이가 먹어가면서 스스로 머리를 짧게 깎아 단정하게 다듬었다. 국가도 개인 못지않게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요동치며 흘러간다. 100년 전 나라를 일본에게 강탈당하고 조선은 나라
를 잃은 백성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로 단발령을 내리고 조선인들에게 상투를 자르도록 강요했다.

선비들은 상투를 자르느니 나의 목을 자르라고 절규하면서 피를 토했다. 그들이 단지 머리카락 뭉치인 상투를 베는 것이 원통해서 목숨을 걸고 저항했을까? 민족의 정체성을 뽑아 버리고 식민화 하려는 살점이 떨리는 치욕때문이었다. 창시개명으로 이름을 갈아버리고 상투를 잘라 조선인들을 무력감과 패배감에 빠지게 하려는 교활한 술책이었다. 일본인들은 적자생존의 원리로 조선인에게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땅과 재산을 빼앗아 무산계급으로 추락시켰다. 조선인들은 고향을 등지고 만주 땅으로 유랑의 길을 떠났다. 민족대이동의 물줄기였다.


고국의 바깥으로 흩어져 사는 민들레 홀씨처럼 뿌려진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공동체였다.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황무지에 정착한 땅에도 민족의 수난은 이어졌다. 청나라는 이민자들의 동화정책으로 머리 앞부분을 밀어내고 뒷머리를 길게 땋아 내리는 만주족 헤어스타일을 강요했다. “머리가 남으려면 머리털을 남기지 마라! 머리털을 남기려면 머리를 남기지 마라” 이 살아남으려면 만주족 머리로 바꾸라는 생존과 직결되는 무시무시한 법령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가혹한 동화정책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흰 눈이 덮이고 칼바람이 부는 만주 땅은 우국지사와 지식인들이 신문을 출간해 자주독립의 민족의식에 불을 지피는 산실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글로벌 시대에 주역으로 급부상할 수 있는 열정은 이등국민으로 짓눌려 살았던 압축되었던 에너지의 원동력이 아닐까? 이번 동계 올림픽에서 김연아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숙적의 라이벌인 아사다 마오를 제압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 무대에서 태극기가 높이 올라가고 애국가가 퍼지는 순간은 통한의 한국역사의 얼룩을 지우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말과 글을 빼앗긴 조선인들은 태극기를 벽장에 숨겨놓았고 벙어리처럼 애국가도 부르지 못하였다. 특히 일본 선수가 한 단계 낮은 자리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고 있는 모습은 일본식민지시대의 치욕을 한방에 날리는 순간이었다.

워싱턴 DC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은 1933~1945년 사이에 나치에 의해 희생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육성으로 증언을 들려주는 역사 현장이다. 유태인 소녀의 안네의 일기 등 다양한 전시로 디지털 매체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생생하게 살아서 깨어있는 역사의 무대로 끌어들인다.우리도 유태인들처럼 덫에 걸린 짐승처럼 신음하던 식민지 시대를 돌아보는 뼈아픈 성찰이 있어야 한다, 올해로 100돌이 되는 한일합방 조약은 홀로코스트와 비길만한 우리 민족의 비운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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