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일란성 쌍둥이 ‘땅콩’

2010-03-0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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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제대로 된 땅콩은 모두 일란성 쌍둥이로서 생김새가 단아하다. 그 유혹에 끌려 땅콩을 먹으려고 표피를 손으로 문질러 까려면 잘 까지는 땅콩 알은 뽀얀 우유 색을 내보이며 웃고 있지만 잘 까지지 않는 땅콩 알은 얼굴을 찡그리며 표피를 움켜지고 있는 표정을 짓기에 버리고 싶은 생각을 들게 한다. 지식과 지혜는 우리 머리에서 태어나는 일란성 쌍둥이다. 그런데도 그 쓰임새가 전혀 다르다. 지식은 우리 생활에서 잊거나 버리기를 싫어하면서 강요하기를 그치지 않고, 지혜는 우리 인생에서 잊거나 버리기를 좋아하면서 설득하기를 쉬지 않는다. 그래서 지식을 끼고 사는 사람은 끝없는 논쟁과 고뇌를 동반하며 살지만 지혜로 사는 사람은 여유와 안정을 동반하며 살게 된다. 삶은 고달프다. 동녘에 아침 여명이 깔리기 시작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부지런히 집에서 나갈 준비를 한다.

일터나 직장으로 나가기 위해서다. 하루, 한 달, 일 년의 삶이 우리에게는 그리 녹녹치 않아 강요를 당하면서 출근길에 나선다. 건강이 좋아 칠팔 십을 산다 해도 얼마 되지 않는 칠 팔 십 개의 한해인데 그 짧은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어느 때엔 명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도 해야 하고, 하기 싫은 일도 억지로 하면서 이어가는 것이 사람들의 서글픈 삶이다. 이런 우리에게 성공과 실패라는 명제는 무엇이며, 또한 발버둥치는 노력은 무엇이며, 지나고 나면 아무런 결론 없이 가버린 희망 또한 무엇인가? 번뇌 투성이었던 과거는 무엇이며 또한 고뇌의 현재는 무엇이며 안개 같은 미래 또한 우리에게 무엇인가? 꿈은 있으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꿈이요, 그리움이 있으되 잡히지 않는 것이 그리움이다. 그저 따라갈 뿐이다. 나는 성공과 풍요를 원하지도 않았지만 실패와 가난을 탓하지도 않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꿈과 그리움이란 일란성 쌍둥이가 가는대로 따라다니는 재미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나이를 많이 먹었다. 길을 가다가 담장을 바라본다. 집을 지켜주고 있으나 따스한 집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언제나 문밖에서 서성이며 막이가 되는 담장들, 그것이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들의 얼굴이고 우리들의 신세였다.
산을 넘지 못하고 굽이굽이 산등을 돌아 흐르거나 낮은 데만 골라 흐르지 않으면 강이 아닌 것처럼 자식들의 높은 눈치를 비켜 내려가거나, 바다에다 몽땅 퍼다 주려고 흐르는 강물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줄 것 다 털어 주면서도 언제나 자식들에게 항복을 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부모들의 세대, 껍질을 벗기려고 애를 써도 껍질이 벗겨지지 않는 일란성 쌍둥이의 한쪽 땅콩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껍질을 벗겨 변화를 시켜주고 싶어도 변화가 되지 않는 문명의 자식들을 눈
앞에 두고 사는 우리는 서글프다.

자식이라도 어떤 때엔 잊거나 버리고 싶은 부모들, 사랑의 본질은 변하지 않겠지만 사랑의 행위가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주(主)라는 한문을 보면 임금 왕(王)자 머리에 금관이 아니라 가시면류관을 쓴 자가 주(主)가 되는 것이다. 옛날부터 왕들은 많았지만 주인(主人)이 되지 못한 까닭은 왕들이 자신을 위한 호화로운 금관 대신 남을 위하여 살과 마음을 찢는 가시면류관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가시면류관을 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한문에서 부터 밝힌 이 절묘한 예측, 누가 이 땅에 오시어 가시면류관을 쓰고 가셨을까? 어디에서나 가시면류관을 쓰는 사람이 주인인 것이다.

가정에서는 가족을 위하여, 사회에서는 이웃을 위하여, 나라에서는 백성을 위하여 가시면류관을 쓰고 고군분투하는 사람이 가정의 주인이요, 사회의 주인이요,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일란성 쌍둥이라도 길이 다른 것은 지식과 지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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