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 김연아! 나의 50년 전을 돌아보며

2010-03-0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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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영(전 국가대표선수 코치)

김연아 선수는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피겨 여자싱글에서 한국인으로는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연아는 퍼시픽 콜리세움에서 열린 대회에서 총점 228.56점(= 78.50[쇼트프로그램]+150.06[프리스케이팅])을 받아 세계기록을 경신하며 우승하였다. 장하고 장하다!

지금으로부터 42년전인 1968년 그레노블(프랑스)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대회에 남자선수 이광영(20세)과 여자선수 김혜경(18세), 이현주(18세)가 우리나라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김연아선수는 출전한 지 42년 만에 달성한 쾌거이므로, 이제부터 한국의 피겨스케이팅 100여년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된 것이다. 지금 내 나이도 70! 내가 꿈에도 이루지 못했던 일을 김연아 선수가 내 대신 이루었다는 착각 속에서, 김연아 선수의 나이였을 나의 50년 전을 회상해 본다. 한국에 최초로 피겨스케이팅 경기를 개척하신 나의 아버지(이세만: 6.25전쟁 당시 납북)를 따라서 7살때부터 나는 피겨스케이트를 시작했었다. 당시의 피겨스케이팅은 경기종목, 진행방법, 채점방식이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었다. 나는 피겨스케이팅 남자고등부, 대학부, 일반부선수로 1, 2등을 도맡아 했었다. 7살부터 스케이팅을 배워왔으니 당시로는 거의 독보적이었다. 왜냐하면 시골에서는 발썰매가 고작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 출전했던 1956년1월 20일 한강에서 열렸던 “이대통령각하 제80회탄신경축 및 제36회 전국체육대회동계빙상대회” 피겨스케이팅부에는 경기임원이 선수보다 많았고, 피겨종목은 컴펄서리(규정과제)와 프리로 나누어 진행했다. 6.25 휴전직후에 거행되는 전국대회이고, 볼거리라고는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관중들이 한강으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프리스케이팅은 현재의 것과 비슷했는데, 경기본부에 레코드판과 곡목을 제출하면 축음기로 트는 음악에 맞추어 스케이팅을 소화했다. 날씨가 추워서 축음기의 회전속도가 느려지거나 빨라
지면 그 음악에 따라 맞추어야 했다. 대통령이 경기관람차 행차라도 하시면, 진행중인 경기를 멈추고 대통령 일행에게 시범경기를 보이기 위하여 시범팀을 급조하여 피겨스케이팅을 시행하였다.


한번은 어느 선배선수가 페어스케이팅을 시범하려고 뒷쪽에 가서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찰이 급습하여 영등포경찰서로 연행하였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밝은 대낮에 시뻘건 다리를 내놓고 남녀가 얼음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 풍기문란죄라는 것이라 훈방조치로 석방은 되었지만, 이미 시범경기는 끝나고 대통령도 떠나신 다음이었다. 1959년에는 한국일보사 주최로 미국의 빙상무용단 “홀리데이 온 아이스”를 초청하여 중앙청 뒷마당에 특설링크를 만들고 우리나라 사상 초유의 외국 피겨 아이스쇼를 공연하여 당시 스케
이터들과 관객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때 조정근 선수가 참가하여 한국 최초로 이 쇼단에 입단하였다.

시국이 안정되고 경제적으로도 점점 나아져서 피겨인구의 저변확대가 이어졌고, 참가할 수 있는 대회도 전국체전 외에 전국종별선수권대회, 전국종합선수권대회 등 다양하게 발전해 갔다. 마침내 1964년에는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이 개장하게 되어 겨울에만 타던 스케이팅이 사철 가능해졌다. 그리하여 각 학교마다 빙상부가 생겼고 선수층도 점점 두터워졌다. 더구나 1964년 여
름에는 역시 한국일보사 후원, 대한피겨스케이팅협회(당시) 주최로 제4회 아이스카니발, ‘스케이트 타는 춘향전’을 공연하였다. 이 때는 협회 임원과 선수들을 총망라한 화려한 무대를 만들어 올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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