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의 그림

2010-01-1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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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우(홈 아트 갤러리)

사랑이란 말과 글은 있는데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형체가 없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화가들이 형체가 없는 피 사물을 사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사람의 내면 감정을 끄집어내 표현하려고 노력한 표현주의 화가 두 사람 그림을 보면 너무나 대조적이다. 한사람은 행복만을 갈구하였고 또 한사람은 불안, 고독, 시름, 같은 인생의 비극 면에서 주제를 구하여 행복의 반대편 그늘진 부분을 화폭에 담았기 때문이다.

프랑스화가 르느아르(A,Renolre,1841-1919)의 시골에서의 춤(Dance in the Country)을 보면 촌스럽게 여인의 손엔 부채를 쥐고 남자의 엉덩이는 엉거주춤 춤추는 솜씨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런 분위기에서도 여인의 얼굴은 행복이 가득하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피식 입가에 미소를 띠우게 한다. 반대로 노르웨이화가 뭉크(Munch,Edvard,1863-1944)의 비명(Scream)을 보면 온 몸에 전류가 흐르는 느낌의 공포감이 들어 소름이 끼친다. 강한 색체와 데포르메(Deformer), 그는 만년에 세계정세의 악화에 따르는 고난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시인 소설가 또는 극작가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가 ‘사랑’이란 단어인데 그들은 말과 글이 있기에 사랑이란 표현의 감정을 높였다 낮추었다 하면서 그 맛을 작가의 입맛대로 요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화가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감정의 표현을 화폭위에 담기란 쉬운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화가들이 많이 사용하는 하트(Heart)를 사랑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트모양의 그림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랑이란 언어처럼 도구화 또는 기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음악의 높은음자리표처럼 상품의 로고 같은 하트만으로는 시인, 소설가처럼 사랑이란 옥타브(Octave)를 높였다 낮추었다 할 수 없다.

따지고 본다면 사랑이란 언어도 마찬가지다. 세계 8개국 언어를 할 수 있는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A, Toynbee1889-1975)는 그의 모국어 영어의 단어 중 가장 애매모호한 단어가 러브(Love)라는 단어라고 불평한다. 남녀간의 사랑이나 예수의 박애정신, 석가모니의 자비도 모두 같은 러브란 단어를 사용하며 어떤 물건이 좋다는 것이나 그것을 가지고 싶다는 표현도 러브란 단어를 사용한다고 불평을 한다. 사랑이란 그 폭이 깊고 높아서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기에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랑이란 평등한 사랑이다, 평등한 사랑은 수학공식 같이 50대 50의 사랑이다. 주는 사랑이 50이면 받는 사랑도 50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공평하지 않는가? 혼자서 만은 사랑을 할 수 없다. 혼자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짝사랑 뿐이다. 이런 사랑은 불행이지 행복한 사랑이 아니다.

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꽃을 사랑하는 이유는 꽃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향기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꽃에서 나쁜 냄새를 풍긴다면 누가 꽃을 사랑하겠는가?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도 마찬가지다. 강아지가 꼬리를 치며 재롱을 떨며 주인을 따르기에 개에게 먹이를 주며 귀여워 한다. 만약 개가 늑대처럼 주인을 문다면 개를 사랑하겠는가? 이런 사랑은 모두가 평등한 보편적인 사랑이지 위대한 사랑이라고는 볼 수 없다. 위대한 사랑이란 50을 주고받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조건 없이 99%가 아니라 100% 몽땅 주는 사랑이다. 인류역사상 이런 사랑을 하신 분은 딱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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