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통곡하는 누드

2010-01-0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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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춘기 (골동품 복원가)

나는 지금 뉴욕 맨하탄 미드타운 동쪽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미국실 화랑의 한 곳에 서 있다. 나의 시선은 비만에 가까운 30대 여인의 누드화에 못 박혀 있는지 오래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저 누드화를 통해서 십년전 바로 오늘과 같은 지난 연말 있었던 한 사건을 연상하고 있었다.

당시 나의 스튜디오(Oriental Antique Restor. 동양골동품 복원사)는 맨하탄 60가에 있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84가에 있어, 꽤 먼 거리인데도 센트럴팍을 가로질러 걸어서 박물관을 드나들었다. 늦은 시각, 맨하탄 패션감각이 물씬 나는 60대의 백인여자가 들어섰다. 여인을 감싸고도 남을 큼직한 욕실타월에 돌둘 말린 그림액자를 받아 탁자 위에 놓고 타올을 걷어냈다. 고급스러운 액자인데도 그림이 있어야 할 캔버스는 온통 붉은 색이다. 여인이 말한다
‘스프레이’ 외마디 소리, 그리고 ‘미스터 백만 믿는다’ 한마디 남기고 사라져 갔다.


‘스프레이’가 강하게 품어낸 적색액체를 캔버스그림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걷어낸다는 작업은 기술 못지 않게 수없이 반복되는 복원작업을 통해 익힌, 말초신경에 와 닿는 육감이라는 고도의 테크닉이 요구된다. 일을 착수한지 10일, 본바탕 그림에서 드러난 모습은 누드였다. 작업 16일 누드는 오일칼러로 정교하게 그려진 10대 후반의 소녀였다. 나는 많이 파손된 그림을 복원한 바 있다. 그 가운데 누드그림도 적지 않다. 이런 가운데서 백인상류층 여성들은 어떤 형태든 자신의 누드화를 소장하기를 바란다는 느낌을 가졌다. 화가 그 당사자가 누구든 여자 또는 남자 앞에서 누드로 포즈를 취하고 장시간 그것도 며칠 몇 달 동안 전신노출을 유지한다는 것은 확실히 일생의 희열로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문제는 붉은 색 스프레이 벼락을 맞은 지금 내가 복원작업을 거의 끝마쳐 가고있는 이 누드화이다. 이 누드화를 자세히 살펴볼 때 누드의 주인공은 그림의 소장가임에 분명하다. 스프레이 세례의 속사정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질투, 시기, 분노, 슬픔... 이 모든 것이 한데 뭉쳐 마치 폭발하는 화산같이 누드에 보복을 가하지 않았나 하는 결론이 나온다. 복원작업 한달 후 누드의 주인공이 스튜디오에 들어왔다. 벽 한 복판에 걸려있는 누드화에 시선이 멈춘다. 나는 살아생전 한 인간이 기절하려는 한 순간을 처음 보았다. 내가 부추기려는 것을 뿌리치고 그 자리에 똑바로 선다. “오 보이! 오 마이 갓” 이런 것을 보고 희열과 감동의 극치라 했던가! 여인은 자기 일생을 거쳐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순간의 정점에 지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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