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눔의 행복 - 메리 크리스마스!

2009-12-2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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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이 취미가 된 것은 아마 어린 시절 토요일 저녁마다 방영되던 ‘주말의 명화’ 프로그램 덕인 듯합니다. 제임스 딘, 오드리 헵번, 로버트 테일러, 리즈 테이러, 록 허드슨, 그레고리 펙, 게리 쿠퍼…. 이제는 고인이 된 명배우들의 명연기는 빡빡머리 사춘기 소년이 흥분과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줄어드는 남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감독 이름도 가물가물하고, 주연 배우들도 기억나지 않지만 스토리만큼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주인공 남자가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면서 시작됩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갑판에 누워 따스한 햇살을 즐기던 그는 어느 순간 자욱하게 밀려든 안개에 전신이 노출됩니다. 바다에서 돌아온 몇 주 후 자신의 몸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 그는 의사를 찾게 되고, 의사는 그가 방사선에 노출되었음을 알려줍니다. 현대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그는 계속 줄어들어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에게조차 공격 당하고, 더 나아가 거미에게까지 목숨의 위협을 느낍니다. 아내는 그가 고양이에 의해 죽었다고 생각하고는 미련 없이 집을 떠납니다.

며칠 후 의사가 치료에 대한 희망적인 소식을 들고 찾아옵니다. 그러나 텅빈 집에서 이젠 한 점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 그를 의사는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집을 떠나는 의사를 향해 목이 터져라 절규하는 그의 모습을 줌 아웃(zoom out)하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영화를 본 후 며칠간 그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에 길을 걷다가 수시로 흠칫흠칫 놀라 발밑을 내려다 볼 정도로 심각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서적으로 민감한 사춘기 시절, ‘인간 실존’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만들었던 영화였습니다. 완전히 잊혀진 한 인간의 고독과 절망이 내 것처럼 느껴져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가끔 생각날 정도로 말입니다.

2004년 12월26일 새벽, 성탄 축제를 뒤로 한 채 고요히 잠든 동남아 일대를 진도 9.5 사상 최악의 쓰나미가 덮쳤습니다. 무려 28만여명이 숨지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절망했습니다. 세상은 연일 초대형 재해를 보도하며 들썩였고 그들을 주목했습니다. 많은 나라, 수많은 자선기관들이 그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그러나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의 존재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습니다. 도움의 손길도 함께 없어졌습니다. 5년이 지난 오늘, 그들은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영화 속의 줄어드는 남자 주인공처럼 그들은 분명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으며, 피나는 재활노력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5년 전, 그들의 수호신이라도 된 것처럼 모금을 위해 난리를 치던 자선기관들도 그곳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입니다. 며칠 전 가장 피해가 컸던 인도네시아 반다 아체지역의 월드비전 재활사업팀으로부터 날아온 ‘아시아 쓰나미 피해지역 5년 사업 보고서’는 그들을 까맣게 잊고 있던 나의 무관심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줄어드는 남자에 대한 오랜만의 회상과 함께 말입니다.

이틀 후면 성탄절입니다. 경제도 어렵고 일상을 살기가 그리 만만치 않지만, 이번 성탄은 내가 잊고 살았던 것들에 대해, 또는 잊혀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쓰나미 5년 사업 보고서는 그들을 후원하신 여러분의 도움이 이제 결실을 맺었다는 기쁨과 감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을 대신해서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박준서 (월드비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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