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 일상, 깨달음 - 당신은 나를 누구라 하십니까?

2009-12-2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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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시냐고 물으면 대개는 ‘메시야’ ‘나의 희망’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 등등으로 대답합니다. 다분히 교의적이거나 추상적인 예수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현상은 그리스도인들의 맹점이라 하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정작 뚜렷한 예수상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기록과 사건, 인물들은 예수님을 더 분명하게 부조시켜주는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속에서 예수님을 자세하고 생생하게 이해하고, 그려내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복음서에 나타나신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그분은 약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나사렛이라는 촌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성년이 될 때까지 정규 교육을 받는 대신 아버지의 생업을 따라 일을 하셨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분을 목수였다고 말하지만 그 목수라는 일이 요즘처럼 카펜터라는 전문적인 직업인이 아니라 간단한 도구로 가구를 만들고 집도 짓고 돌도 다듬는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노동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총명하셨습니다. 당시 서민들이 쓰던 아람어를 사용하면서도 성전에 들어가 히브리어 성경을 읽은 몇 안 되는 청소년 중에 한 분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상류층에서 쓰던 헬라어도 능통하셨습니다. 또 아주 젊은 나이에 구약성경과 자기 민족의 역사를 꿰뚫어 아시고 기억하셨습니다. 신약 복음서 곳곳에 그분의 언어실력과 해박한 역사관이 엿보입니다.

그분은 폭력을 싫어하셨습니다. “네 오른편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편 뺨마저 돌려대어 주어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용기와 결단의 의지를 가진 분이셨습니다.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시련을 피하지 않으셨고, 극단의 처형을 용서로 받아들이셨습니다. “할 만하시면 이 잔을 옮겨 주소서.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마지막 기도에서 인간적인 고통과 함께 용기와 결단을 보게 됩니다.

그분은 가난하셨습니다. 평생 한 벌의 옷으로 만족하셨고, 정해진 거처가 없으셨습니다. 자신이 가난하셨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지내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배려하는 분이셨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셨고,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신적인 권위의 모습도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누구라고 보십니까?”하고 질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답변, 그 믿음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메시야로서 권위를 가지고 계심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시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늘로 돌아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가서 뭇사람들에게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행동한 것을 가르쳐 따르고 지키게 하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바탕을 하나님의 신적 권위에 두지만, 개개인의 믿음의 알맹이는 우리와 동일하게 되셨던 당신의 모습을 닮아가는 데에 두셨습니다. 교리 속에 화석화 된 예수님이 아니라 내 삶의 현장에 어깨동무가 되어주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 모습과 사상을 닮고 실천해 가는 일이 신앙의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만나야 믿음의 맥박이 뛰고 진정한 생명의 더운 피가 내 속에 돌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이기도 하고 구원이라는 최종 과제의 과녁을 보여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이 인간이 되신 날,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생각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요?


송순태 (카라미션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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